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은밀한 구조다. 나의 기억은 희미하고 불완전하지만, 그 희미함조차 내 존재의 핵심이다.
기억은 내 삶 전체가 압축된 패턴이며, 뇌가 세상을 효율적으로 이해하려고 만든 생존 알고리즘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살았다. 그러다 문득 어느 순간 타인도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존재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때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경이로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났었다.
하지만 당시의 농촌 환경은 이런 질문을 붙잡아둘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학교 공부 및 동네 친구들, 농사일 등이 전부였고, 주변에 이런 생각을 공유하거나, 다양한 책을 읽어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 사유는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뇌 깊숙한 곳에 흔적처럼 남아 내가 그런 생각에 일어났던 감정적 동요가 가끔씩 일어났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등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려고 했다.
초중학교에서는 늘 1등을 했고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다. 그러나 고3이 되자 성적은 흔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는 명확하다. 고3의 공부 방식은 '빠른 이해'가 아니라 '느림, 반복, 장기 집중'을 요구한다. 나의 사고 구조와 학습 방식이 충돌한 것이다.
재수 시절, 혼자 공부하자 성적이 다시 올랐다.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나의 리듬대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들어간 뒤에도 같은 문제를 경험했다. 경영학은 실용 중심의 학문이고, 사례와 분석 및 끈질긴 계산 능력이 중요한데, 나는 언제나 원리와 구조, 존재를 탐구하는 쪽에 가까웠다. 회계사 시험에서 고전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느리고 반복적인 암기 중심 학습은 내 존재 방식과 맞지 않았다.
내 삶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에 영향을 크게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 주어진 환경의 영향도 크게 받는다. 그리고 그 DNA 및 환경적 요소가 많은 기억으로 스며들고, 패턴화를 만든다.
하지만, 기억은 제한된 구조물이다. 어렸을 때, 아직 환경에 대한 인식을 할 정도로 뇌가 발달하지 않았고, 주변의 환경도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에, 패턴화 된 기억의 구조는 사실 원시적 수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학부모님 참관 수업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모두 혼자 적극적으로 답을 제시했다. 그때 학부모 한 분이 저 애는 혼자서 다하네~라는 말을 들었고, 그 뒤로는 선생님 질문에 신중하게 균형을 맞추며 답변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참 웃고 있을 때, 옆에 있는 녀석이 원숭이처럼 웃는다고 해서, 그 뒤로는 내가 못생기고, 웃는 모습이 원숭이 같다고 생각이 되어, 한동안 소극적 성향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뇌가 타인의 인식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잘못된 기억을 만들고, 그 패턴이 나의 행동을 제약하게 만들었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다른 사람의 다른 의견들이 섞이면서 희석되었다.
우리는 타인의 견해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기억은 존재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존재를 제한하는 틀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기억은 실제 과거가 아니라, 뇌가 선택하고 재구성한 패턴이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시 만들어진다'. MIT와 콜롬비아 대학 연구에서 밝혀졌듯 엔그램은 재활성화될 때마다 변형된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지금 이 순간 뇌가 재편집한 과거의 모형일 뿐이다.
현대 인지신경과학은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기억이 순간순간 이어 붙인 '내러티브적 환상'으로 설명한다.
마이클 가자니가의 연구는 자아가 뇌의 해석 장치이며, 데이비드 이글먼은 자아를 뇌가 만든 '생존을 위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기억이 변하면 자아도 변하고, 자아가 변하면 존재의 해석도 달라진다.
기억은 보호 장치이지만 동시에 족쇄다.
뇌는 익숙한 패턴을 선호하기에 기존 기억은 현재를 해석하는 틀이 되고, 그 틀은 미래를 제한한다. 인지심리학에서 이를 '기억 기반 예측성(memory-based predictive coding)'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려면 기억과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스탠퍼드의 연구는 새로운 경험이 들어올 때 기존 회로가 약화되고 새로운 회로가 생성된다는 '경험 기반 재구조화'를 보여준다. 인간은 기억으로 구성되지만, 기억을 넘어설 때 변화한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진짜 과거가 아니다. 기억은 언제나 내 뇌가 허용하는 방식으로 재편집된 인지적 구성물이며, 그 구성물은 내 존재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감각의 제약, 주의의 폭, 언어의 한계, 환경의 조건들—이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를 만든다.
이렇게 보면 기억은 나를 효율적으로 살게 하는 도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과거의 방식으로 보도록 나를 가두는 장치이기도 하다. 뇌는 익숙한 회로를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현재를 살면서도 오래된 기억이 만들어낸 방식으로 반응하며 살 때가 많다.
기억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활동을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 기억을 지우라는 뜻이 아니라, 기억이 만든 낡은 패턴들이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이 들어올 때 뇌는 과거의 회로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회로를 만든다. 나는 나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의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의무다.
기억은 나를 구성하지만, 기억을 넘어설 때 나는 비로소 나로 존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