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이수봉- 치유의 시간

by 한재영 신피질

청계산에서
나무들이 아침을 맞고 있다.

내 키의 열 배는 족히 넘는 참나무, 소나무들이 저 높은 곳에서 햇빛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아침을 맞는다.


나 역시 영혼을 곧추세워 그 나무 위로 올라가고 싶어 진다. 가지와 잎들이 벌이는 아침의 성찬 속으로 들어가, 가슴속 상처를 다독이고 싶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자꾸만 가슴을 구겨 놓는다. 그 구겨짐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은 오르막 새벽길 내내 가슴 한복판을 떠나지 않는다.


슬픔과 두려움은 어느 순간 불쑥 솟구치고, 그 근원을 찾아 정신을 집중해 보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슬픔과 두려움은 종족 보존을 위한 포유류의 본능일까? 아니면, 유아기에서 생긴 기억의 생채기가 해마 속에 남아, 시간과 침묵을 타고 지속되며, 영혼 깊숙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일까?


그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생채기의 감각을 따라가 보아도, 그 자리는 여전히 오르막 내내 함께 있다.



하지만 자연은 신비로운 치유자다. 설령 그것이 수천 년을 이어온 유전적 슬픔이라 해도, 자연은 어느 순간 나무와 햇빛과 공기와 습기를 한데 엮어 새 힘을 불어넣는다.


한 시간 산행 후, 벤치에 앉아 아침 구름 위로 비추는 햇살을 받는다. 햇살은 아기처럼 순수하게 내리쬔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그 빛을 받아들인다.


생각을 멈추고,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의 여정을 느껴본다.


그러면 어느새 생채기의 흔적이 옅어지는 것만 같다.

답답하던 가슴이 풀리고, 대신 곧게 편 가슴과 곧추세운 허리에 생명의 기운이 돋는다.


건강한 정신과 에너지는 감각을 깨워 상처와 걱정 대신 자연에 집중하게 만든다.


아늑하게 펼쳐진 참나무들, 단단히 감긴 줄기들, 선명한 녹색 잎사귀들, 아침 노래를 부르며 고고하게 앉아 있는 까마귀들, 그리고 살갗에 닿는 맑은 공기의 움직임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러면 문득, 내면에서 경이로움과 기쁨, 여유가 피어난다.


굳이 이름난 명산이나 대자연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청계산은 나에게 치유의 선물을 전해준다.


참나무의 단단함과 소나무의 고고함은 이수봉을 오르는 길 내내, 내 몸과 부딪치듯 다가와 피부를 어루만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슬픈 상처와 두려움을 달래 준다.


일상 깊숙이 박힌 두려움은 쉼 없이 가슴과 머릿속을 맴돌지만, 이곳 청계산에서는 나무들이 내 안의 두려움을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건강한 기운과 경이로움으로 채워준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르막에서 느꼈던 슬픔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가슴 가득 밀려든다.


햇살은 온 누리에 따스하게 퍼지고, 모든 사물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삶의 가치는 곳곳에 스스로 넘쳐나고, 생존의 투쟁이 아닌 존재의 환희 속에,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 찬다.


만나는 사람마다, 스치는 것들마다 연민과 사랑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난다.


이 느낌을 글로 담고 싶어 진다.

글 속에 담긴 사랑과 치유가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청계산에서 움트는 아침과 생명의 기운, 그리고 사랑의 찬미가가 내게 한 줄기 위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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