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의 행복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의무다.
새벽 찬 공기라도, 마시려고 밖으로 나가 집 한 바퀴라도 돌아야 한다.
영하 십 도 날씨에도 햇빛을 눈에 담고, 낙엽과 돌멩이 가득한 산길을 걸어야 한다.
살갗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추위조차 견디고 감사해야 할 소중한 감각이다.
무작위로 널려 있는 작고 불규칙한 돌멩이도 나만큼 가치로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면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산길과 나무들을 가득 채우고, 삶의 구석구석을 채운다.
산행 초, 아직 풀리지 않은 허벅지 근육과 발목이 시큰거려도, 내 몸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이니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삶이 불편해질수록 생명은 강렬해지고 감각이 새로워진다.
바스락거리는 죽은 나뭇잎 소리마저 귀에 선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새들은 찬 공기를 타고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가지 사이로 드러난 쪽빛 청명한
하늘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넓은 화강암 바위 위로 햇빛이 온통 퍼지며 바위를 드러낸다. 무수한 세월이 새긴 바위
주름과 색의 스펙트럼이 추상 세계를 연출한다.
감각이 다시 젊어진다.
용기는 새로운 감각과 사고의 기반이다.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이 삶의 목적이자 축복임을 느끼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편안함과 나태와 결별하고, 육체의 감각이 불편해하는 곳으로 몸을 몰아붙여야 한다.
그런 용기를 내야 하고, 그 시도를 지속해야 한다.
지속시키는 용기는 결국 내 몸을 관조하는 일이다.
한 번에 한 번씩 숨을 들이마시고, 자연에 다시 천천히 돌려주는 그 용기를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굳이 거창하게 가족사랑이나 인류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강과 바다가 협력해서 만든 공기를 소중히 들이쉬고 되돌려줄 용기면 충분하다.
과천종합청사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능선길이다. 이곳은 겨울 속의 봄 같은 곳이다.
바닥에 낮게 자란 소나무들이 완만한 경사로를 타고 빽빽이 들어서서
햇빛을 받아 녹색의 광채를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전신을 가득 채우고, 호흡은 배 속 깊은 곳에서 움직인다.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추운 기온에는 하늘과 산 능선의 경계가 뚜렷하다.
산의 경계는 리듬의 곡선이다. 능선과 능선이 곡선을 이루며 리듬을 타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관악산 모든 생명체는 각각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이다.
주종인 소나무조차 자세히 보면 똑같이 생긴 나무가 하나도 없다.
수없이 다양한 곡선과 굴곡이, 가지와 가지 사이의 간격이, 가지의 굵기가, 가지의 방향과 잎의 많고 적음이 조합을 이루며 수많은 변화를 만든다.
하지만, 더욱 자세히 보면 또 모두 같다. 잎은 가지 끝에 달려 있고, 솔꽃은 잎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솔방울은 동일한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하며, 솔잎의 간격과 방향, 색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삶도 사람도 제각각이다. 동일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그러나 또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 팔다리 두 개씩.
그러니 다르다,다르지 않다를 놓고 왈가왈부할 일이 무엇인가.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것, 그것이 하늘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특징이 아닐까.
겨울 계곡물소리는 여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가늘다. 비도 없는 겨울에
흐르는 계곡물은 산이 얼음을 부수어 만든 물이다. 죽은 듯 보이지만, 곳곳에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의 생명수다.
그 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