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녹고, 질문은 남았다

관악산에서 생명의 질문

by 한재영 신피질

한파가 전국을 강타했지만, 과천 관악산 능선길은 남동쪽으로 햇빛이 가득하다.
관악산은 바위산이다. 바닥 대부분이 암반이라 나무들이 크게 자라지 못한다.
주종인 소나무조차 내 키보다 작아, 넉넉한 그늘을 만들지 못한다.

그 덕분에 산행 내내 밝은 햇살 기운을 온몸에 받는다.


그래서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시원한 청계산을,

겨울에는 이곳을 자주 찾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소나무 이파리 위에 조금씩 남아 있다.

마치 목화송이처럼, 혹은 눈열매처럼 솔가지마다 하얀 눈이 매달려 있다.

소나무 잎들이 하늘에서 내린 눈을 소중히 받들고 있는 듯하고
녹색의 솔잎 위에 하늘꽃이 조용히 피어 있는 모습이다.



산길 바닥에는 눈이 녹아 스며든 물기로 황토흙이 고슬고슬하다.
작년에 떨어진 낙엽들은 풍화 작용 속에서 서서히 흙과 하나가 된다.

소나무가 주종인 산이라 길 위에는 솔잎이 가득하다.
황톳빛 흙과 정갈하게 어우러진 솔잎 위를 밟는 감각이 유난히 부드럽다.


바위에는 눈이 녹아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다.
마치 바위가 물을 가득 머금은 생명체처럼 보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기를 조심스레 디디며 바위를 오른다.


차가운 공기는 코끝을 찌르지만, 시야는 맑다.
저 멀리 눈 덮인 청계산이 평소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청계산 북쪽 사면에는 검은 나무들과 그 사이를 가득 메운 흰 눈이 남아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그곳에서는 아직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정부종합청사 인근 공원과 과천 남쪽의 야산 역시 눈이 녹지 않아 온통 하얗다.
마치 내가 겨울 풍경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듯, 이곳저곳을 세심히 바라본다.



눈이 녹지 않은 바위길은 여전히 미끄럽다.
개척자의 정신으로 오르려다 금세 포기하고 옆길로 돌아선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바위길은,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눈앞의 소나무에 매달린 솔방울을 본다.
작은 솔방울들이 까맣게 솔가지마다 촘촘히 달려 있다.


모든 동식물의 삶에는 단순한 원칙이 있다.
생존, 그리고 종족의 번식.


관악산에서도 한 줌의 흙만 있으면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칼바람을 맞으며 살아간다.
낮은 키의 소나무들 또한 수백 개의 솔방울을 매달고 때를 기다린다.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 씨앗들은 흙 속으로 스며들어 또 다른 생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명은 늘 그렇게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환경의 급격한 변화 앞에서 생명은 수없이 생멸을 반복해 왔다.

지구에는 총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빙하기,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과 같은 외부 환경 변화로
대부분의 생명체가 사라졌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일부 생명이 다시 번성했다.


약 2억 5천2백만 년 전, 페름기 말.
시베리아 초대형 화산 폭발로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급증했고,
지구 평균기온은 약 10도 상승했다.
그 결과 해양 생물의 96%, 육상 척추동물의 70%가 멸종되었다.


가장 최근의 대멸종은 약 6,600만 년 전 백악기 말이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지름 10~12km의 소행성이 충돌했고,
대기 중에 먼지가 퍼져 태양빛이 차단되었다.

광합성이 붕괴되며 식물이 사라졌고,
그 결과 1억 6천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류는 유인원까지 포함해도 고작 500만 년 남짓한 시간을 살았다.
공룡의 시간에 비하면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전 지구적 기후 변화와 급격한 기술 발전을 바라보면
인류가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지구에 머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엘런 머스크가 화성 식민지를 언급하는 이유도 결코 허황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출산율은 0.75~0.8 수준으로 한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명이 충분히 길어진다면 출산율 감소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지나치다.


향후에 인공지능 휴머노이드가 신생아를 대신하게 될까. 최근 말 못 하는 반려견에 대한 의존도를

생각하면, 꼭 그렇게 안되리라는 보장도 없을 듯하다. 너무 지능이 뛰어나서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십여 년 후 일자리가 대부분 로봇으로 대체된다면, 청년들의 일자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렇다면 굳이 출산율을 높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선택이 진화를 만들듯, 인공 선택이 인류세의 변화를 만들지 않을까?



앞으로 50년 후, 양자컴퓨터가 발전해 인체의 신비가 풀리고
암이 극복되며, 줄기세포와 체세포 재활용 기술로
인간의 건강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난다면, 그때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공룡시대의 1.6억 년에 비하면 호모사피엔스는 0.18% 시간이 지났는데...
도대체 공룡은 1억 6천만 년의 긴 세월동 무엇을 했던 걸까?

진화를 포기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것인가?


현재 인류는 지구 생명체 가운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최초로, 외부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로 멸종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눈 덮인 바위길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탓인지
평소보다 숨이 더 가쁘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통증이 밀려오고
산소가 부족한 듯 호흡이 거칠어진다.

늘 오르던 바위와 가파른 경사인데도
매번 안간힘을 써야 한다.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


아침마다 반복하는 기상, 팔 굽혀 펴기와 턱걸이,
달리기와 산행.


왜 이런 지옥 같은 일을 계속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래도 하기로 했으니,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



육체는 고뇌의 덩어리다.

만약 육체 없이 정신과 기운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랑과 자비, 철학적 사색은 그대로 지닌 채
몸은 없는 그런 존재라면 어떨까.


중턱의 두꺼비바위 아래 작은 굴 속에
스티로폼 상자가 놓여 있다.
짐승이 겨울 추위를 피하라고 누군가 마련해 둔 작은 집이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개 사료가 보인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노란 두 눈을 반짝이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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