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 완성 - 성종

조선의 통치 기본 법전

by 한재영 신피질

칼로 세운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제도로 다듬어진 나라는 시간을 견딘다.

조선은 건국 이후 거의 한 세기를 거쳐 하나의 거대한 법전으로 자신을 고정하려 했다. 그 법전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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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흩어져 있던 법령을 하나로 통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편찬 작업이 시작된다. 세조는 최항·노사신·서거정 등에게 대전 편찬을 맡겼다. 이는 단순한 행정 정비가 아니라, 국가 통치 기준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군주였다. 정통성 문제는 늘 따라다녔고, 공신 세력은 강했다. 칼로 얻은 권력을 법으로 고정하려는 시도, 흩어진 속전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상법’을 만들려는 의지, 그것이 경국대전 편찬의 출발점이었다. 세조의 의도를 정통성 확보 하나로만 환원할 수는 없지만, 법전 정비가 왕권 안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국대전은 세조 한 사람의 시대에 완성되지 않았다. 예종 원년(1469)에는 상정소 제조 최항과 김국광 등이 정리한 이른바 ‘기축년대전’이 마련된다. 이것은 중간 단계였다. 이후 성종 대에 이르러 다시 대대적인 교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성종 원년(1470) 실록에는 교정에 참여한 인물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정창손·신숙주·한명회·구치관·심회·윤자운·서거정·양성지·최항 등 당대의 핵심 관료들이 각 전(호전·공전·형전·이전 등)을 나누어 교정하도록 명 받았다. 이 장면은 경국대전이 개인 저술이 아니라 국가 총력 프로젝트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성종 16년, 1485년, 을사대전이 완성·반포된다. 공식 편찬 기간만 따져도 약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건국 이후 축적된 법령까지 포함하면 거의 90년의 제도적 응축이었다.


경국대전은 6전 체계로 구성되었다. 이전은 관직과 인사, 호전은 호적과 조세, 예전은 국가 의례, 병전은 군사 제도, 형전은 형벌, 공전은 토목과 기술 행정을 다루었다. 판본은 8권 체계로 편제되었고, 원문은 목판본 기준 수천 면에 달한다. 현대 번역본은 주석을 포함하면 수천 페이지에 이른다. 국가가 오랜 세월 매달려 완성한 방대한 통치 법전이었다.


이에 비해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건국 직후 조선이 어떤 정치 이념 위에 서야 하는지를 밝힌 개인 저술이다. 경국대전이 국가 운영의 세부 규범을 집대성한 법전이라면, 조선경국전은 국가의 철학적 방향을 제시한 설계도에 가까웠다.


성종 16년 반포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參酌古今 制爲大典 永爲遵守之法

옛 제도와 당시의 실정을 참작하여 대전을 만들고, 영원히 준수해야 할 법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大典乃國家常法也

대전은 국가의 상법이라는 선언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형식적 표현이 아니다. 왕이 바뀌어도 통치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형벌과 관련해서는 실록 곳곳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依大典論罪 대전에 따라 죄를 논하라는 원칙이다.


형전에는 태·장·도·유·사의 오형 체계와 형량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판결은 원칙적으로 그 기준에 근거해야 했다.

관직 임명 또한 대전에 근거했다.

官秩載在大典 不可擅改


관직의 품계는 대전에 실려 있으니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왕의 인사권조차 직제의 틀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경국대전은 현대적 의미의 헌법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최고 규범이 아니라, 왕조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통치 법전이었다. 왕을 사법적으로 심판하는 조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은 왕을 법정에 세우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국대전은 왕의 자의적 통치를 일정 부분 제도 안에 묶어두려는 장치였다. 삼사 제도와 간쟁 기능은 왕의 결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었다.


연산군이 삼사를 억압하고 형벌을 자의적으로 행사했을 때, 문제로 지적된 것은 단순한 폭정이 아니라 ‘상법’의 질서를 무너뜨린 행위였다. 경국대전은 명나라의 《대명률》 등 동아시아 법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 현실에 맞게 재구성된 독자적 체계였다. 완전한 모방이 아니라 계승과 변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경국대전의 첫머리가 형벌이 아니라 관직 체계라는 사실이다. 조선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범죄가 아니라 질서의 붕괴였다. 조선은 자유의 국가라기보다 관계와 위계를 중시한 질서 중심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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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전은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다. 영조 대의 《속대전》, 정조 대의 《대전통편》, 고종 대의 《대전회통》으로 이어지며 기존 틀 위에 보완되었다. 조선은 혁명적 개정보다 연속성을 택했다.


결국 경국대전은 한 왕의 업적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쳐 완성된 국가 프로젝트였다. 세조가 시작했고, 예종이 이어받았으며, 성종이 완성하고 반포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통치는 원칙적으로 그 법전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칼은 순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제도는 시간을 지배한다.

조선은 칼로 시작했지만, 《경국대전》이라는 제도로 자신을 오래 유지하려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500년 왕조의 구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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