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기쁨을 배우고 있다.
이 문장을 처음 마음속에 떠올렸을 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어린 시절 걷는 법을 배우고, 학교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사회에 나와 경쟁하고 성취하는 법을 익힌다. 그러나 정작 기뻐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늙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삶을 돌아보면 기뻐할 일은 적지 않았다.
학창 시절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여러 시험에 합격했으며, 사회에 나와 좋은 직장에 입사했다. 수많은 승진이 있었고, 여러 상장을 받았다. 생일도 있었고, 결혼이라는 큰 전환점도 있었으며, 결혼기념일과 가족의 중요한 날들도 지나왔다. 두 아들이 태어났고, 가족과 함께 숱한 시간을 걸어왔다.
겉으로 보면 제법 충실한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순간들을 온몸으로 기뻐했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환하게 웃고, 소리 내어 기뻐하고, 누군가와 얼싸안고 축하하며, 그날을 하나의 축제로 만들었던 장면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기쁜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쁨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통제를 먼저 배웠던 사람인지 모른다. 들뜨지 말아라. 좋아도 티 내지 말아라. 겸손해야 한다. 다음 목표를 준비해야 한다. 성취의 순간에도 이런 목소리가 늘 먼저 올라왔던 것 같다.
승진을 하면 기쁨보다 책임이 먼저 떠올랐고, 상을 받으면 만족보다 부족함이 먼저 보였다. 생일도 담담하게 지나갔고, 기념일도 하나의 일정처럼 지나갔으며, 좋은 일이 생겨도 그것을 잠시 누리기보다 곧장 다음 과제로 이동했다. 그러니 기쁨의 사건은 있었지만 온전하게 기뻤던 감정과 추억은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수십만 년의 진화 과정 속에서 획득한 생존 장치라는 점이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생존에 유리한 행동에 보상을 붙여 놓았다. 먹이를 찾으면 만족감을 주고, 공동체와 연결되면 따뜻함을 주며, 새로운 것을 탐험하면 설렘을 준다. 인간이 기쁨을 느끼도록 설계된 이유는, 그렇게 해야 살아남고 번성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뇌과학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뇌의 보상회로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들고, 성취했을 때 만족을 느끼게 한다. 흔히 도파민이라고 불리는 신경전달물질은 단순한 행복 물질이 아니라 ‘가서 얻어라’라는 동기의 신호에 가깝다고 한다.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고, 시도하게 만들며, 다시 도전하게 만든다.
반면 목표를 이룬 뒤 느끼는 편안함과 충만함은 또 다른 생리적 회로와 관련된다.
결국 기쁨은 사치품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인 셈이다.
어린아이들의 기쁨이 유난히 강렬한 것도 이해가 된다. 아이들은 모든 것이 새롭다. 나뭇잎 하나, 빗방울 하나, 케이크의 촛불 하나도 경이롭다. 생일 선물 하나에도 세상이 열린 듯 웃는다. 뇌는 새로움에 강하게 반응하고, 새로움은 학습의 기회를 의미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아이가 호기심 많고 쉽게 기뻐하는 것은 세상을 배우기 위한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좋으면 즉시 웃고, 뛰고, 소리친다. 감정이 몸으로 곧장 흐른다.
반대로 어른이 되면 새로움은 줄고 책임은 늘어난다.
뇌는 생존보다 관리에 익숙해진다. 해야 할 일, 비교해야 할 대상, 지켜야 할 체면이 늘어나면서 기쁨의 회로는 점차 억눌린다. 특히 경쟁 사회에서는 타인의 성공조차 나의 불안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누군가의 승진은 나의 정체처럼 보이고, 누군가의 합격은 나의 실패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서로 축하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 경계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기쁨은 급속히 메말라 간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무리 속에서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사냥에 성공하면 함께 기뻐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축하했으며, 풍년이 들면 함께 춤추었다. 공동체의 기쁨은 개인의 기쁨이었고, 개인의 성취는 집단의 자산이었다. 타인의 기쁨에 함께 웃을 수 있는 능력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집단 결속을 높이는 생존 전략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감적 기쁨이라고도 부른다.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질투와 비교의 소모를 줄이고, 관계의 신뢰를 키우며, 자신 역시 더 높은 정서적 만족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남의 기쁨을 축하하는 순간, 뇌는 고립이 아니라 연결의 신호를 받는다. 공동체의 연대감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내 삶에는 행복감은 늘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이 있고, 일할 수 있었고, 건강을 지키려 애쓸 수 있었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토대가 있었다. 그것은 잔잔한 행복이었다. 깊은 곳에 흐르는 지하수처럼 삶을 지탱하는 안정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의 기쁨이었다. 얼굴이 환해지고, 몸이 들썩이고, 사소한 일에도 눈이 반짝이며, 좋으면 바로 웃어버리는 그 원초적 생동감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가지를 더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타인의 기쁨에도 함께 참여하는 능력이다.
행복과 기쁨은 다르다. 행복은 지속되는 상태에 가깝고, 기쁨은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생명의 에너지에 가깝다. 행복은 고요한 호수라면, 기쁨은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물결이다. 나는 호수는 가지고 있었지만, 물결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결은 혼자보다 함께 있을 때 더 크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기쁨은 다시 배울 수 있을까.
과학은 의외로 낙관적인 답을 준다. 뇌는 고정된 기관이 아니라 경험에 따라 변하는 가소성을 가진다. 새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새로운 정서 회로도 강화될 수 있다.
웃음이 대표적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웃음은 기쁨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기쁨을 키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웃을 때 얼굴 근육과 호흡이 바뀌고, 몸은 긴장을 풀며, 주변 사람과의 연결감도 높아진다. 기쁨이 웃음을 만들고, 웃음이 다시 기쁨을 키우는 선순환이 생긴다. 함께 웃을 때 그 효과는 더 커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작은 실험을 하려 한다. 좋은 날씨를 보면 일부러 감탄하기. 운동을 마치면 스스로 박수하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솔직하게 기뻐하기. 생일에는 자신을 축하하고, 기념일에는 함께 지나온 시간을 기념하기. 누군가를 만나면 먼저 환하게 웃기. 작은 성취라도 기념하고 축하하기. 그리고 타인의 성공에도 아낌없이 박수하기. 승진한 후배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잘된 친구를 기뻐하며, 가족의 작은 성취에도 함께 환호하기. 기쁨을 기다리는 대신 기쁨이 들어올 문을 여는 일이다.
나이 들수록 묵직한 기쁨도 중요하다. 자녀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안도감, 평범한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감사, 조용한 자연 속에서 느끼는 충만함은 젊은 날의 흥분과는 다른 깊이를 지닌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벼운 웃음과 장난기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잘 늙는다는 것은 묵직함 속에서도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상태인지 모른다. 더 나아가 타인의 기쁨에도 함께 웃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나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취만 추구하다가 기쁨이 무엇인지 묻지 못한 채 지나간다.
나는 이제라도 묻고 있다. 그리고 배우려 한다.
나는 성공하는 법은 어느 정도 배웠다. 책임지는 법도 배웠다. 견디는 법도 배웠다. 이제 남은 공부는 하나인지 모른다.
기뻐하는 법.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법.
어쩌면 그것이, 인생 후반부에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가장 인간다운 공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