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럽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륙이었다.
독일은 제조업 강국으로 세계를 주도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금융과 산업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지금 유럽을 보면, '유럽의 병자'라는 자조적 표현이 더 어울린다.
1. 유럽 IT 산업 경쟁력 상실, 아웃소싱
내가 1994년 삼성전자 가전 해외본부에서 반도체 사업부로 옮겼을 때만 해도 유럽은 여전히 자국의 PC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의 Apricot, 프랑스의 Bull, 독일의 지멘스 , 영국의 싱클레어, 에프리컷, 이탈리아의 올리베티, 핀란드의 아이시엘 같은 기업들이 시장에 있었지만, 결국 IBM, 델, HP 같은 미국 기업과 중국·대만의 저가 제조업에 밀려 철수하거나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반도체 산업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한때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던
독일 인피니언은 삼성 반도체 대비 경쟁력 하락 및 사업 부진 끝에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했다.
이는 유럽이 반도체 산업에서 더 이상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유럽은 자국 내 제조업을 동유럽과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점점 산업 기반을 약화시켰고, 이때 이미 유럽 경제는 서비스와 금융 중심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신호가 뚜렷했다.
핀란드의 노키아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노키아는 1990~2000년대 초반 전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40% 이상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로 전환에서 뒤처지며 삼성과 애플의 공세를 막지 못했고, 결국 2013년 휴대폰 사업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노키아의 몰락은 유럽 제조업이 기술 혁신의 전환기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독일 제조업 인더스트리 4.0 도전 및 AI 산업 부족
2011년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내세우며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한다고 선언했다. 스마트 팩토리와 사물인터넷, 사이버-물리시스템 같은 개념은 신선했고, 한국 기업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호는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독일은 제조업 디지털화에만 집중했지만, 미국은 클라우드와 플랫폼, AI로 산업 전반을 재편했고, 중국은 모바일과 제조, AI 굴기로 산업 생태계를 키웠다.
결국 독일은 소프트웨어와 AI 역량 부족, 보수적인 기업 문화와 규제 장벽으로 혁신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인더스트리 4.0은 좋은 구호였지만,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는 제한적 성과만 남겼다.
최근 독일은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했다.
저렴한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던 에너지 모델은 전쟁 이후 무너졌고, 중국 수요 둔화는 자동차와 기계 산업에 직격탄이 되었다.
전기차 시장에서는 BYD와 테슬라에 밀리고, 인구 고령화로 숙련 인력 부족은 심각하다. 독일 정치권은 연정 갈등으로 산업 전환 속도를 높이지 못했고, 이런 요인들이 겹치며 독일은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을 다시 듣게 되었다.
EU 전체의 성장률은 1%에도 못 미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저성장에 머물러 있다.
스페인과 폴란드, 헝가리 등은 EU 회복기금을 활용해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유럽 전체를 살리기엔 역부족이다.
영국은 2024년에 1% 남짓 성장했지만, 코로나 시기 위축된 경제가 외형적으로 회복된 듯 보일 뿐, 실질 1인당 GDP와 PPP 기준 생활 수준은 여전히 정체되어 있다.
임금은 올랐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체감 소득은 거의 늘지 않았고, 국민이 느끼는 삶의 질은 개선되지 못했다.
EU의 AI 기가 팩토리 및 AI ACT 등 대응 전략, 윤리적 규범 선도 시도
한편 유럽은 인공지능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EU는 2조 유로 규모의 'AI 기가팩토리' 프로젝트를 통해 대규모 GPU 인프라를 구축하려 하고, AI Act를 통해 윤리적 규범을 세계에 선도하려 했다.
그러나 규제와 혁신 사이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이 이미 앞서 나가는 상황에서 EU의 시도는 속도와 자원 면에서 제한적이다.
트럼프 행정부 관세 및 국방비 증액 등 과제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15% 합의, NATO 회원국에 국방비 5% 증액 요구 같은 외부 압박은 유럽이 AI와 디지털 전환에 투자해야 할 재정을 갉아먹고 있다.
방산과 에너지 안보에 쏠리는 비용이 늘어날수록 AI와 첨단 산업으로 전환하려는 유럽의 발걸음은 무거워진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1990년대 유럽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의 강력한 경제 기반이 있었던 대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조업 기반을 잃고, 에너지, 인구, 정치, 산업 전환 모두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한때 성장 엔진이었던 독일은 병자 논의에 다시 들어갔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정체에 묶여 있으며, 영국은 코로나 이후에도 국민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유럽이 겪는 진짜 문제는 제조업을 외부로 아웃소싱하면서 미국과 같이 양질의 일자리가 줄고, 그 결과 중산층이 축소 및 양극화 심화된 점이다.
그렇기에 유럽은 인공지능과 첨단 산업을 육성하며 자립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별 산업 구조와 문화의 차이가 커서 통합된 전략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유럽이 직면한 과제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경제의 민주화와 균형 있는 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산업과 일자리, 사회적 분배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유럽은 AI 시대에 미국과 중국등에 경쟁력을 상실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