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장. 컨트롤 타워의 착시
AI 혁명은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기업의 리더십과 조직문화까지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어떤 기업은 성과를 넘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어떤 기업은 과거의 유령에 발목 잡힌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그 갈림길에서 한국 기업은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TSMC가 보여주는 길
실리콘밸리의 구글 회의실에는 직급의 장벽이 거의 없다.
인턴도 CEO에게 질문할 수 있고, 아이디어를 반박할 수 있다.
‘20% 프로젝트’는 직원이 일주일 중 하루를 자유롭게 새로운 실험에 쓸 수 있게 했는데, 이 제도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지메일과 구글 뉴스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늘 이렇게 말했다. “Day 1.” 매일을 창업 첫날처럼 생각하며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정신이 아마존을 세계 최대의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30년 넘게 CEO 자리를 지키며 엔지니어 중심 문화를 유지했다. 그는 기술자와 경영자가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회사를 만들었고, 작은 GPU 회사는 오늘날 AI 시대의 두뇌가 되었다.
TSMC의 모리스 창 역시 특별하다. 그는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25년을 제조 공정 전문가로 일했다. 그 경험과 전문성을 토대로, 대만에서 세계 최초의 파운드리 모델을 만들었다. 그의 경영은 철저히 전문성 + 개방적 생태계에 기반했다.
그리고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예술, 인문학을 융합해 “사람의 삶을 바꾸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 뒤를 이은 팀 쿡 역시 오랜 운영 경험을 가진 전문가로, 장기적 리더십을 통해 회사를 지탱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전문성과 장기 리더십, 그리고 기업가 정신과 철학이 기업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업에 드리운 그림자
한국 기업의 현실은 다르다.
창업 1세대는 기업가 정신으로 도전과 개척을 이끌었다. 하지만 2세, 3세로 세습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역량이나 경험과 관계없이 혈연으로 경영권을 이어받고, 실제로는 전문성 없는 오너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은 ‘가신 그룹’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재무와 관리 출신이다.
기술이나 철학보다는 단기 실적과 비용 절감, 권한 행사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결정은 늦어지고, 조직은 창의적 도전보다 안전한 숫자 맞추기에 몰두하게 된다.
나는 현장에서 이런 풍경을 수도 없이 보았다.
회의실은 협력의 공간이 아니라 보고와 질책의 무대였다.
누군가는 차라리 병원에 입원해서라도 회의를 피하고 싶다고 농담을 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말속에는 조직을 지배하는 긴장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목소리가 커지고, 질책이 난무하면 신뢰는 증발했다. 남는 것은 숫자와 실적뿐, 창의는 움트기 어려웠다.
잭 웰치의 유령
잭 웰치가 이끌던 GE는 한때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 불렸다. “1위 아니면 철수” 전략과 20-70-10 인사 원칙은 냉혹하지만 효율을 극대화했다. 그의 경영은 미국적 토양 위에서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2000년대 초반 “GE를 배우자”는 열풍이 불었지만, 개인주의와 실패 허용 문화가 자리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집단주의, 위계, 실패 금기의 문화였다.
그 결과 GE 식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창의와 혁신 대신 공포와 불신을 낳았다. 제도는 수입할 수 있어도, 문화는 수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삼성의 고민
최근 삼성 고위 임원은 언론에 “조직은 신뢰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문화”라고 토로했다.
성과 압박 속에서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고, 내부에서는 “불신의 악순환”이라는 말이 돌았다.
젊은 AI 인재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사는 이제야 문화 혁신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뿌리 깊은 관성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조직의 신뢰는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위기일수록 숫자 뒤에 숨지 않고 투명하게 공유하는 것, 맡긴 만큼 권한을 믿고 주는 것, 실패를 낙인이 아니라 학습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작은 기여를 인정하는 것. 이 네 가지가 쌓여야 비로소 신뢰가 회복된다.
젊은 세대는 위계와 통제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자율과 의미를 원한다.
회사가 신뢰할 수 없다고 느끼면 과감히 떠나지만, 반대로 성장의 기회와 비전을 보여주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몰입한다.
나는 현장에서 이 차이를 직접 보았다. 과거 회의실은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했지만, 최근 들어온 젊은 직원들은 다르다. 스스로 배우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수평적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 만약 기업이 이들의 에너지를 신뢰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한국 기업을 다시 신바람 나게 할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한국 기업의 선택
AI 시대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성과를 내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조직문화와 리더십이다.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애플, TSMC는 신뢰와 자율, 전문성과 철학으로 혁신을 만들었다. 한국 기업
이 진짜로 바꿔야 할 것은 숫자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 조직을 움직이는 문화다.
신뢰 없는 성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공포 속의 효율은 창의를 죽인다. AI 시대, 한국 기업에 필요한 건 새로운 기술보다 새로운 문화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은 과연 어떤 문화를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