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은 치료사
나는 한때
이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몸이 무너질 때
사람의 삶도 같이 기울어진다는 걸 알았고,
그 기울어진 각도를
손으로 다시 맞춰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공부했고
손을 단련했고
남의 통증을 외우는 법을 배웠다.
치료실에 처음 섰을 때
모든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고
모든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건
이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구조의 한계였다.
나는 하루에 수십 개의 몸을 만졌고
그만큼 내 몸은
천천히 망가져 갔다.
어깨는 늘 뻐근했고
허리는 항상 다음 통증을 예고했다.
그건 사고도, 무리도 아니었다.
그저 직업의 기본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아픈 사람들 곁에 오래 있을수록
내 아픔은 말할 자리를 잃었다.
치료사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처럼 취급됐고
아픔을 말하는 순간
전문성부터 의심받았다.
나는 치료를 좋아했지만
이 직업은
치료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점점
치료보다 숫자가 먼저 보였다.
사람보다 회전율이 중요해졌고
회복보다 시간표가 앞섰다.
환자를 향한 마음은 그대로였는데
환경은 그 마음을 계속 닳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치료를 ‘잘’하고 있는지보다
‘언제까지 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계산했다.
그리고 그 계산의 끝에는
항상 같은 결론이 있었다.
오래는 못 간다.
그 사실이
가장 나를 무너뜨렸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좋아할 수 없다는 것.
사회에서 바라보는 치료사의 얼굴도
점점 납작해졌다.
전문가는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 노동자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
존중받지 못하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다른 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튼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선이 옮겨가고 있었던 것뿐이다.
치료를 버리는 게 아니다.
치료만이
내 전부가 되는 삶을
버리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몸을 존중하는 사람이었고
회복을 믿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제는
그 믿음을
나 자신에게도 쓰고 싶어졌다.
떠나는 마음은
패배가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는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는
치료실 안에서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