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영화, (스포주의)
'오만과 편견'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책에 관심이 많으니, 책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실용서를 좋아하는 내겐 소설은 늘 후순위였다. 평소 외국 영화를 좋아하니, 어떤 영화를 볼까 둘러보고 있었다. 그냥 '오만과 편견' 단어가 좋았고 끌렸다. 클릭하고 어느덧 영화는 끝이 났다.
감상평으로는. 남주는 오만을 연기하고, 여주는 편견을 연기한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오만과 편견은 여러 사건을 통해 서서히 혼합하기 시작한다. 오만하다고, 편견이 있다고 나쁘진 않았다. 그들의 고유성에는 장단점이 존재했다. 여주는 편견이 있기에 줏대가 있었고 그런 매력에 남주가 빠져버렸다. 오만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남주를 가까이 갈수록 그는 오만보단 지조가 있던 사람이었다. 점차 여주의 편견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며 시야를 넓혀주게 된다. 아름다운 스토리다. 시야를 넓혀주는 사람과 시야를 넓힐 줄 아는 사람의 스토리랄까.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지조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휘둘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손실 편향 때문에 감사함보단, 부정과 잃는 것에 더 예민하니 조금이라도 스치면 연줄을 끊는 사람을 자주 봤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맞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에게 솔직함을 연기한 무례함으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몇몇 봤다. 이건 이성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다. 그냥 무례한 거니까.
그래서 그런가, 상대를 볼 땐 내가 보는 시선 하나를 믿어왔다. 개인적으로 내 편견만을 믿는다. 누군가의 의견, 생각, 시선은 하나의 참고용일 뿐이다. 이런 가치관은 때로 내게 상처가 되기도 했고, 더 이상 이런 가치관을 이끌어나갈 힘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선택에 후회하는 게 더 싫었기에 언제나 사람을 마주할 땐 백지로 시작해 나만의 시선과 생각으로 마주한 상대를 그려나간다. 굳이 장단점을 나열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애쓴다. 과거에는 단점만 보느라 고생했는데, 최근까지는 장점만 보느라 고생했다. 안정적인 음색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시도랄까. 이젠 어디가 중간인지 대충은 느낌이 온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가치관을 되새김질하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난 편견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나와 가치관이 맞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강인한 정신과 믿음을 사랑한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자신이 잘못하더라도, 실수하더라도. '괜찮아, 그런 사람 아니잖아.' 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라면 그게 고의였다면 더 미안해하며, 잘못과 실수라면 더 이상 그러지 않기 위해 더 굳건한 다짐을 하게 되니까.
내게 글은 진심이고, 하나의 편지다. 남주와 공감되는 부분 중 하나는 솔직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남주도 이게 하나의 불치병 같은 존재였고, 여주에게 쓴 편지 한 통이 편견을 와장창 깨고야 말았다. 나도 진심을 전할 땐 언제나 편지를 쓰곤 한다. 가끔은 글은 글이고, 행동은 행동이라는 판단 때문에 글에 오로지 나를 담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게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머릿속에 알고만 있고, 그걸 글로 쓸 줄 안다면 사람은 서서히 변한다. 정말 경험담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서 살아갈까, 괜히 반성하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매도하기도 하며, 나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하기도 하니까. 때로는 이 망할 변연계를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생각이 몰려올 때 속으로 '그만. 그만' 외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지난 시간의 인식과 감정이 상황을 과대포장하니까. 상대가 나빠 보이는 건 결국 나의 기억 속에서 등장한 것이니까. 소문에 의해 타인의 인식이 변했다는 건, 내 줏대가 없다는 뜻이니까.
반성과 다짐, 여러 교훈을 얻게 된 영화였다. 시야를 넓혀주는 상대를 만난다는 건 행운이지만, 시야를 넓히는 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일이다. 이 차이 하나로 가끔은 큰 행운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에서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사고 하나가 새로운 발견과 삶의 흥미를 돋궈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