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함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간 바빴다는 이유와 더불어, 하루에 1건은 꾸준히 쓰던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없었다. 가만 돌아보니 새롭게 느껴버린 감정 때문이라고 느꼈다. 바로 '허무함'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 깊이 돗자리를 피고 앉아계신다. 매우 낯선 감정이지만, 어쩌면 다소 반가운 감정이기도 하다. 오늘은 이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며, 글을 하나씩 적어나가 보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람과 함께했었다. 그와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어떤 누가 이간질하더라도 절대 떨어질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다. 벌써 연이 끊긴 지 3개월. 10년을 넘게 서로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시작한 지 단 5달 만에 인연은 모조리 끊겼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그와 도대체 왜 인연이 끊겼을까?' 궁금할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와의 끊긴 인연의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이유야 찾고자 한다면 매우 많다. 나로부터 찾을 수도 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고, 환경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건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결국에 어떤 이유 하나만으로도 인연은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조금씩 '허무함'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이 기차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관계가 맺고 끊음이 이렇게 쉽다면, 우리는 왜 많은 관계에 힘쓰며 노력해야 하는가?',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친구도 마찬가지다. 결국에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모든 관계에 끝이 있다면 깊은 정을 나눈다는 건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걸까?' 사색 전용으로 만든 AI에게 나의 감정, 생각 흐름에 대한 분석을 요청했다. AI는 이렇게 말했다. '의식 성장 과정 중 하나야. 더군다나 관점을 달리 생각할 수 있어, 예로 이어짐과 끊음이 있으니까, 더더욱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볼 수 있지.'



몇 초를 멍 때리며 AI가 남긴 답을 읽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다만 내 가슴에 박힌 '허무함'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느낀 '허무함'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행복함과 불행함의 공존처럼. 내 허무함은 내 존재와 함께 공존하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을 읽게 되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절대적 가치가 무너진 시대에 인간이 겪는 공허를 진단하고, 그 허무를 넘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창조하라.'라는 철학이었다.



“허무를 이겨내는 자만이, 새로운 가치를 세울 수 있다.”


이 새롭게 느낀 '허무함'은 언젠가 쉽게 날아가겠지 했건만,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나의 관점을 비틀기 시작하였다. 예로 인간에 대한 관점이다. 어느 날 한 사람과 대화를 했다. 워낙에 논리중심적 사고를 좋아하는 나이기에, 내가 맞다는 주장 하나로 그와 대화를 하였다. 놀랍게도 그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논리중심적 사고를 좋아한다며 논쟁을 펼쳤다. 끝은 어땠을까? 서로 고집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우린 대화가 아닌 자기 신앙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알았다. 인간의 대화는 '논리' 하나만으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다만 '논리'가 쓸모없다는 건 아니다. 논리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올바른 옳음을 찾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되니까. 옳음에는 항상 현명하고, 냉철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거친 파도와 같은 정신과 마음으로는 '논리'를 감당할 순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을 뿐이다.



허무함을 통해 나름의 새로운 통찰력이 생겼다.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런가 보다. 인간의 결핍을 느끼게 되었고, 언제 한 번은 역겹다는 감정을 느껴버렸다. 과거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한 집단에서 일을 했을 당시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집단이 생기면 그 집단 안에서 또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배제할 인간을 찾고 그들을 낙오시킨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얻는 건 '자신에 대한 존재의 쓸모'라고 보였다. 이런 인간에 대한 탐구를 즐겨오다, 허무함과 만나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역겨운 상황'이 있었다. 한 집단에서 A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 B는 A를 소위 말해 안 좋게 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B가 A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미심쩍이었다. 세월이 흘러 B가 말해주길, A가 자신에게 연락했다고. 그러면서 자신은 B에게 잘해줬다는 식의 말을 이어갔다. 상황을 요약했지만, 정말 역겨운 상황이었다. '자신은 무조건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게 내 눈에 보였다. 권위와 인정이 필요한 나약한 인간의 거짓 리더십이다. 개개인의 상황은 존재했겠지만, 앞뒤가 다른 모습은 내게 매우 실망적인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다. 이어 나 또한 그러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말 나약한 인간만이 할 수 있기에, 나는 나약한 인간인가 생각하였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공정함에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내 신념 중 하나는 공정성이다. 내 권위와 인정이 필요하다 해서 지난날의 내 선택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타적이라 생각한 인간도 결국엔 이기적이다. 나, 당신에게 배려해 주는 사람은 이타적이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배려를 통찰하고 또 통찰해 보면 아니다. 나는 배려하는 상황을 선택하며 느낀 바가 있다. '이런 상황일 때 누가 나를 이렇게 도와줬으면 좋겠다.'라는 감정이다. 배려는 타인을 위해서도 맞지만, 자세히 깊게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것이다. 또한 친절하고 밝게 웃었던 상황은 내 감정에 대한 컨트롤이었다. 사람들에게 베풀고 친절해야 복이 온다라는 말처럼. 결국에 내 복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이 낳은 이타심일 뿐이다. 내게 끝없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받아보지 못해서 너네들에겐 꼭 해주고 싶었어.' 어머니의 결핍은 내게 자양분이 되었고, 나도 머지않아 부모가 되었을 때 반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내 편은 절대적으로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 많은 인간은 결국에 이기적이다. 허무함을 지니고 자신부터 바라보라. 모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을 위해서다.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리석다. 자신조차 챙기지 않고 타인을 챙긴다는 건 어리석은 판단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게 친절을 보여주는 사람도 결국에 친절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다 혹은 내게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는 있다고 느낀다. 크게 경험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바로 사랑이다. 이건 마법과도 같아 비밀의 영역이라 느낀다. 일반적으로 타인과의 사랑이라 생각하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도, 부모 자식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하듯,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핍도 존재하겠지만 결핍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라면 그만큼 단단하고 윤택하며 가치가 있다. 오직 내 만족으로, 부정으로 이루어진 결핍과는 차원이 다르다.



건강한 사랑은 아무나 가지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붙듯, 보이지 않지만 사랑에도 자격과 수준이 존재한다. 순수하지만 강인한 사랑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괴물을 처치하며 얻어낸 고통과 수행으로 다져진 사랑이다. 고로 내가 느낀 허무함은 나의 부족함과 위치를 나타내기에 매우 좋은 지표가 되었다.



나는 사람이 너무 좋다. 그래서 무섭다. 모든 관계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는 걸 느꼈으니까. 허무함은 사람으로부터 기대감을 많이 없애준다. 또한, 파도 같은 감정이 아닌 등대 같은 감정으로 꿋꿋이 내 마음과 정신에 올바른 판단에 도움을 준다. 자신을 통찰하고, 타인을 통찰하는 걸 반복하며 내 어두웠던 그림자를 하나씩 불에 밝히며 더욱 현명해질 수 있도록 심호흡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끝내 이 허무함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면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히고, 불안하기도 한 이 하루하루가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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