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연인들: 친밀함의 적, 익숙함

by 쓰다쟁이

아주 오래된 연인들: 친밀함의 적, 익숙함

(마 13:53-58, 막 6:1-6, 눅 4:16-29)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그럼 1시간 뒤에 너희 집 앞 카페에서 볼까?”

친구가 보낸 톡을 확인하고 답을 보냈다.

“엥?? 일단 알겠어. 거기서 보자.”

곧 카페에서 친구를 만났다.

“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찾아오고 그래?”

친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오래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때를 찾지 못했어. 하지만 이제는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친구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뭔가를 결심한 듯한 그의 진지한 태도에 나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네가 나에 대해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어. 사실 난 여기 사람이 아냐. 난 소행성에서 왔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겨우 그런 이야기 하려고 날 보자고 한 거야?”

생각지 못한 싱거운 소리에 갑자기 신경질이 나려고 했다.

“믿기 힘들겠지. 그래서 나도 오랫동안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였어. 그런데 너에게만은 꼭 털어놓고 싶었어.”

“너 갑자기 왜 그래? 네가 소행성에서 왔으면 나는 안드로메다에서 왔겠다. 장난 좀 적당히 해.”


예상했겠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다.

지어낸 이야기란 말이다.

만약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 것 같은가?

소행성에서 왔다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 농담이라고 생각하거나, 몰카를 찍는 거라고 여길 게 틀림없다.


고향 나사렛에 방문했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펼쳐 읽으시고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사렛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갈릴리 일대에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여러 회당에서 그가 전한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분명 나사렛에도 그 소문이 들렸을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 고향 출신인 예수가 유명 랍비가 되어 인기를 얻고, 뛰어난 가르침과 놀라운 능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우리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예수를 위해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할 정도였으니.

우리 고향 출신의 잘 나가는 랍비인 예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회당을 찾았고, 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싶어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성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었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가 바로 자신이라고 이야기하자 나사렛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당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예수와 함께 지냈던 깨복쟁이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성장기를 지켜본 동네 어른들, 예수를 오래 지켜본 이웃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쟤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가 저를 한두 해 알아 온 게 아닌데 저런 소리를 하면 믿을 줄 알았던 거야? 쟤네 엄마랑 동생을 오늘도 보고, 어제는 밥도 같이 먹었어. 우리가 한 동네에서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저런 엉뚱한 소리를 믿으라고 하는 건가?”

나사렛 사람들은 황당해했고, 예수는 고향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비호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갈릴리의 여러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에 매우 놀랐고, 그를 뒤따랐다.

하지만 고향인 나사렛은 달랐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고, 심지어는 그를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고까지 했다.

도대체 왜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다른 동네 사람들과 엇갈린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가장 잘 알던 고향 사람들이 먼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곡진하게 영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배척한 이유가 익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더 믿기 어려웠다.

낯설고 생경한 것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익숙하고 오래 알았던 것에 대해서는 도리어 경시하기 쉽다.

익숙한 것에 대한 멸시, 낯선 것에 대한 경외랄까.


딸이 한참 사춘기를 통과할 때 나는 딸과 종종 다투었다.

친절하던 딸이 쌀쌀맞게 대하고 거칠게 표현할 때면 속이 상했다.

그런데 집 밖에서 딸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친절하고 상냥했다.

심지어는 밝고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친절하면서 나한테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라며 물은 적이 있다.

딸이 말했다.

“아빠는 가족이잖아.”

가족에게 더 친절하고 상냥해야 하는 건 아니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부모님과 통화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당신은 아버님, 어머님과 통화할 때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그 편안함 때문에 무례해지기 얼마나 쉬운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잘 알았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친숙함은 예수를 믿고 수용하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다.

예수에 대해 낯선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환대하고 영접하지만, 예수에 대해 익숙했던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배척했다.

예수에 대한 오랜 앎과 경험. 그 익숙함이 그들의 문제였다.


종교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영적 성숙으로 나가기 어려운 경우들이 종종 있다.

성경 통독을 매년 여러 번 한다는 사람들, 매일 꾸준히 몇 시간씩 기도하는 이들.

신학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 오랫동안 목회 사역을 했다는 이들.

그들에게서 겸손과 경청을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타인의 이야기와 가르침에 대해 열린 태도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잣대와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심지어 자기 생각과 가치를 주입하려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교회를 잘 알고, 신앙생활에 익숙하고, 경건 생활을 꾸준히 해오면서 생겨난 종교적 능숙함은 도리어 그들의 영혼에 해가 되는 것 같았다.

사역하면서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변화되기 어려웠던 사람은 교회에 처음 발을 내딛거나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쉽게 인정했고, 모르는 것을 물었고, 편견 없이 수용했다.

하지만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신앙적 연륜과 경험이 많은 이들은 좀처럼 자기 확장을 해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알고 있다며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배타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신학 대학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라 교양 과목으로 기독교 관련 과목을 수강할 수 있었다.

그중 한 과목을 수강했던 적이 있다.

수업에 참여한 사람 중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수업을 듣는 분 중에는 목사님들이 여럿 계셨다.

일반 대학에서 기독교 관련 과목을 정식 과목으로 듣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수업 분위기가 어떨지 궁금했고, 왠지 더 편안하고 경건한 분위기일 것이란 순진한 기대도 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수업 중 교수님이 하는 말에 목사님들 여럿은 딴지를 걸고, 시비조의 질문을 자주 던졌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느낄 때 팔짱을 꼬고 콧방귀를 뀌면서 교수님이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수업 때마다 난처해하던 교수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대학 졸업 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실 안 진상 풍경을 기독교 관련 과목에서, 그것도 목사님들을 통해 보았다는 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목사가 되고 나서도 교회 안에서 이런 안타까운 장면을 자주 보았다.

오랜 종교 생활을 해온 사람들에게서 배려와 겸손보다 무례와 교만을, 사랑과 긍휼보다 미움과 무자비를 목격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오랜 종교 생활이 신앙을 숙성시키기보다 응고되게 만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는 공일오비가 1992년에 발표한 노래가 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


오래 사귀어온 연인은 서로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 설레는 감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싫증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통화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고백도 한다.

그러나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만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고, 이별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교회 안에도 이런 오래된 연인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만났던 감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설렘을 잃어버린 사람들.

의무감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하는 종교 로봇이 되어버린 이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이미 마음은 신앙과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를 때가 많다.

하나님에 대한 친숙함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대신하고 말았다.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

친숙함 때문에 응고된 마음을 깨뜨리고, 다시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후렴구가 마치 예언자의 외침처럼 들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심 잡힌 연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