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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Oct 24. 2021

내일 뉴스

전주에 살던 막내 외삼촌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올 때마다 나와 동생들을 위한 간식을 사 왔기 때문에 외삼촌이 오는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어느 날 외삼촌은 먹을 것과 함께 한 손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보물섬>이란 만화 잡지였다. 1982년 10월호, 창간호였다(내가 이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 뒤로도 외삼촌은 매달 <보물섬> 잡지를 사 왔다. ‘아기 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맹꽁이 서당’ 등의 유명한 작품들을 <보물섬>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보물섬>을 계기로 만화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어 소년중앙의 별책부록이었던 <만화 홈런왕>을 접하게 되었다. ‘내일 뉴스’라는 만화가 기억난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아픈 할아버지를 도왔다가 라디오를 선물 받는다. “내일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일어날 소식을 알리는 신비한 라디오였다. 고물 상점에서 비싼 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그림을 사거나, 다음 날 일어날 사고를 미리 알아 인명 피해를 막는 신기한 일들이 계속된다.

‘내일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 시험 문제를 미리 알 수 있으면 답만 외워가면 될 텐데’. ‘복권 1등 번호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 만화를 보면서 이런 공상들을 자주 했다. 단지 하루 뒤에 일어날 일을 알 수만 있어도 오늘의 불안이 확 줄어들 것만 같았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역술, 사주, 관상, 풍수지리가 자주 등장한다. <식스센스>라는 예능에서는 ‘가짜 점을 찾아라’, ‘가짜 역술인을 찾아라’ 등의 내용이 소개됐고, <신발 벗고 돌싱 포맨>에서는 관상가가 출연자들의 미래를 알려주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은 콘셉트 자체가 무속인이다. 오늘의 불안 때문일까. 사람들이 내일 뉴스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목회자인 내게 성도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어떤 결정을 하는 게 맞을지 고민하는 이들, 흐릿하고 불확실한 상황 앞에서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이들을 자주 만난다.

“하나님 음성이 안 들려 다행입니다” 내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알면 힘들지 않겠어요? 내가 죽을 만큼 싫어하고, 꺼리는 것을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시면 어쩌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경 속 인물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던 순간은 몇 번이나 될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지만 말씀하실 때보다 침묵하실 때가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침묵에 감사한다.


아이가 어릴  선택은 주로 부모인 나의 몫이었다. 먹는 음식, 입을 , 어린이집 선택의 문제를 아이에게 맡기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선택의 주도권을 점점 넘겨주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고, 먹고 입고, 진로를 선택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결정했고, 부모인 나는  선택을 최대한 존중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웬만한 문제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있게 해주고 싶었다. 침묵을 통해 아이를 향한 사랑과 신뢰를 말하고 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배웠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배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씨름했다. 때로 넘어지기도 했고,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곤경에 처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질문의 힘, 사고의 근육, 회복탄력성을 키웠다. 하나님의 침묵은 나를 향한 존중과 배려였다.


모호한 인생, 불안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삶이 분명하고 확실하기를 기대한다.

어디로 가면 실패하지 않을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문제가 없을지 알고 싶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은 종종 기독교판 내일 뉴스가 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며 원망과 불신, 냉소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이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나님이 뒤로 물러나시면서 생기는 공간 때문에 활동할 무대가 열리고, 그 공간만큼의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삶을 더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기도 한다.

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면 소리 없는 침묵으로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내일 뉴스’에서 주인공은 내일 일어날 일을 알게 되는 일이 결코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란 걸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불행을 미리 알게 됐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죄책감을 느끼고,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 점점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점점 내일 뉴스를 알려주는 라디오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모르는 내일이 더 안전하다는 것, 불확실한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 ‘내일 뉴스’가 알려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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