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 잔에 붓고 있을 때였다. 방안에 놔둔 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급하게 우유를 마시고 후다닥 방에 들어가 폰을 집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xxx님이세요?” “네. 그런대요.” “어... 나 00이야.” “누구? 00이.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깜짝 놀랐다. 00 이는 초중고를 함께 보낸 오랜 친구다. 우린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교회를 다녔고, 중학교 동창이었다. 00 이가 자기 이름을 말하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내 안에 솟구쳤다. 옛 친구에 대한 반가움도, 오랜만의 조우여서 생긴 어색함도 아니었다. 위축과 수축의 감정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에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정든 고향 친구, 그것도 많은 추억을 공유한 오랜 벗의 전화를 받고 왜 이리 찌뿌둥한 걸까. 저녁이 되고 뒤늦게 집에 들어온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것이 해묵은 오랜 감정이란 걸 깨달았다.
빨간 벽돌로 된 00의 2층 양옥집에 처음 놀러 갔던 날이었다. 확 트인 넓은 거실과 분리된 주방, 여러 개의 방들. 그리고 현관문 옆방인 00의 방에 들어갈 때 나는 갑자기 쪼그라들었다. 재래시장 안에 있던, 정육점을 통과해 들어가야 하는 좁은 우리 집에 비해 크고 멋졌다.
중등부 때 총회에서 하는 성경고사 대회에서 그는 입상했다. 하지만 난 탈락했다. 그는 노래 실력도 뛰어났고, 기타 연주도 잘했다. 당시 고등부 중창단에서 그는 남자 솔로를 독차지했고, 연말에 있던 ‘찬양의 밤’ 행사 때도 비중 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유머 감각도 훌륭했던 그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날 좋아한 줄 알았던 여자애가 00을 좋아한단 걸 알았을 때 펑펑 울고 말았다. 리더십이 있던 그는 회장, 나는 서기였다. 공교롭게 우리 둘 다 대전에서 재수를 했다. 그는 원하는 국립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는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졌고 결국 후기대를 선택했다.
내게 없는 것을 그가 가졌던 게 아니다. 집, 평균 이상의 성적, 노래와 기타 연주, 유머 감각, 리더십, 인기. 모두 내가 소유한 것들이었다. 그가 나보다 조금 더 가졌을 뿐. 그런데 그와 나 사이의 벌어진 그 좁은 틈 때문에 늘 허덕였다.
웃긴다. 열등감.
30년도 더 된 감정이, 기억에 기생한 채 내 안에 살고 있었다니.
이토록 질긴 생명력을 가진 널 약을 먹어 없앨 수 있다면 한 움큼이라도 삼키련만.
가인과 아벨, 사라와 하갈, 에서와 야곱, 라헬과 레아, 사울과 다윗 그리고 00과 나.
성경에 쓰여 있구나. 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