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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Nov 12. 2021

웃긴다. 열등감.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 잔에 붓고 있을 때였다. 방안에 놔둔 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급하게 우유를 마시고 후다닥 방에 들어가 폰을 집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xxx님이세요?” “. 그런대요.” “...  00이야.” “누구? 00.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깜짝 놀랐다. 00 이는 초중고를 함께 보낸 오랜 친구다. 우린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교회를 다녔고, 중학교 동창이었다. 00 이가 자기 이름을 말하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내 안에 솟구쳤다. 옛 친구에 대한 반가움도, 오랜만의 조우여서 생긴 어색함도 아니었다. 위축과 수축의 감정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에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정든 고향 친구, 그것도 많은 추억을 공유한 오랜 벗의 전화를 받고 왜 이리 찌뿌둥한 걸까. 저녁이 되고 뒤늦게 집에 들어온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것이 해묵은 오랜 감정이란 걸 깨달았다.


빨간 벽돌로 된 00의 2층 양옥집에 처음 놀러 갔던 날이었다. 확 트인 넓은 거실과 분리된 주방, 여러 개의 방들. 그리고 현관문 옆방인 00의 방에 들어갈 때 나는 갑자기 쪼그라들었다. 재래시장 안에 있던, 정육점을 통과해 들어가야 하는 좁은 우리 집에 비해 크고 멋졌다.

중등부 때 총회에서 하는 성경고사 대회에서 그는 입상했다. 하지만 난 탈락했다. 그는 노래 실력도 뛰어났고, 기타 연주도 잘했다. 당시 고등부 중창단에서 그는 남자 솔로를 독차지했고, 연말에 있던 ‘찬양의 밤’ 행사 때도 비중 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유머 감각도 훌륭했던 그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날 좋아한 줄 알았던 여자애가 00을 좋아한단 걸 알았을 때 펑펑 울고 말았다. 리더십이 있던 그는 회장, 나는 서기였다. 공교롭게 우리 둘 다 대전에서 재수를 했다. 그는 원하는 국립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는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졌고 결국 후기대를 선택했다.


내게 없는 것을 그가 가졌던 게 아니다. 집, 평균 이상의 성적, 노래와 기타 연주, 유머 감각, 리더십, 인기. 모두 내가 소유한 것들이었다. 그가 나보다 조금 더 가졌을 뿐. 그런데 그와 나 사이의 벌어진 그 좁은 틈 때문에 늘 허덕였다.


웃긴다. 열등감.

30년도 더 된 감정이, 기억에 기생한 채 내 안에 살고 있었다니.

이토록 질긴 생명력을 가진 널 약을 먹어 없앨 수 있다면 한 움큼이라도 삼키련만.


가인과 아벨, 사라와 하갈, 에서와 야곱, 라헬과 레아, 사울과 다윗 그리고 00과 나.

성경에 쓰여 있구나.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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