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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Nov 20. 2021

나의 영웅

“일어나라. 새벽 시간은 황금 어장이다. 지금 공부해야 집중이 잘 돼.”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귀에 쟁쟁한 아버지의 목소리.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야 했다. 물론 원해서 깬 건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문제집을 풀다 꾸벅꾸벅 졸 때면 몸을 움직이거나 찬 물로 세수하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근육 만들기 또 하나는 아들의 공부. 특히 공부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지대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꼭 고려대를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교육은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효력을 발휘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학습 동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나는 공부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성적은 떨어졌고 아버지의 한숨은 깊어졌다. 안방 문 옆 구석에 머리를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내게 “저기 보이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벽지가 저렇게 시커멓게 변했다.”라며 벽을 가리키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 영웅이었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에, 우리 삼 남매를 한 팔로 들어 올리실 정도로 힘이 셌다. 딱 달라붙던 폴라 티 위에 검정 가죽 재킷을 걸치시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흥이 많던 아버지는 노래도 잘 부르셨지만 트위스트 춤이 일품이었다. 가끔 기분이 좋으시면 다리를 흔들며 신나게 춤을 추셨다. 3남매 중 첫째이며 아들인 나를 아버지는 유독 예뻐하셨다. 외출하실 때마다 자주 날 데리고 다니셨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는 글을 모르셨고, 공부를 제대로 해 보신 적이 없으셨다. 아들들만은 대학에 보내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재력이 있던 할아버지는 첫째와 둘째를 뒷돈을 써서 의대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공부에 전혀 소질이 없던 큰아버지들은 둘 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었고, 할아버지는 이 일로 상심이 크셨다. 아버지는 형제들 중 가장 공부를 잘했고 고3 때 고려대에 지원했다. 드디어 합격 발표가 났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아들이 내려오는 날에 맞춰 동네잔치를 벌이셨다. 금의환향하는 아들을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려오는 아들 모습을 보고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하셨다. 아버지는 불합격이었다. 글을 잘 모르던 할아버지가 수험번호를 잘 못 알고 착각하셨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 다 불러놓고 잔치를 벌인 데다, 고려대 합격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놓은 마당에 불합격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 몰던 막대기를 들어 아버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말렸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 친구 집을 전전하며 오랫동안 배회하셨다. 결국 대학에 갈 기회도 놓치고 입대했고, 제대 후 이렇다 할 직업도 구하지 못하고 지내다 동생의 소개로 엄마를 만나셨다고 했다.

“내가 그때 자존심 부리지 말고 교대라도 갔으면 이렇게 안 됐을 텐데” 주변에서 교대라도 가라는 제안을 했지만, 고집부리다 결국 평생 고졸로 사셨던 게 두고두고 후회되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가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내 영웅의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내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아버지가 실망할 때마다 괴로웠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나를 자책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방에 틀어박혀 크게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들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영어 성적이 좋아 영어영문과나 영어교육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기술이라며 이과에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이과를 선택했고, 아는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재수하라는 말씀에 홀로 대전에 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가끔 아버지가 날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어땠을까, 내 진로를 알아서 선택하게 해 주셨다면 어땠을까. 이른 나이에 일찍 깨워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그때 좀 더 반항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과거에 대한 아버지의 후회가 이제 내 것이 된 것 같았다.

ivf 간사로 선발되어 신입간사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당시 훈련 장소였던 에스라 성경연구원으로 편지 한 통이 날라 왔다. 내 생일에 맞춰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였다. 집안에 갑작스럽게 닥친 어려움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도원으로 끌고 가셨는데 거기서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를 나가시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기독교를 완강하게 거부하셨다. 억지로 끌려간 기도원 집회에서 아버지는 마지못해 집회를 인도하던 목사님께 안수 기도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 기도해주던 목사님이 한 말에 아버지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회개하셨고 결국 회심했다. “너는 왜 그토록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느냐? 네 아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느냐?”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극적인 사연과 함께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들아. 너의 인생을 내가 망쳤구나. 미안하다. 내가 하나님께 회개 많이 했다. 널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내 욕심이었구나. 날 용서해다오’. 단순한 생일 축하 편지라고 생각해서 무심코 열어보았다가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훈련을 수료하고 집에 돌아왔을  아버지는  따로 방으로 부르셨다.  앞에서 다시 용서를 구하셨다.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시며 “익환아.  인생을 내가 망쳤다. 미안하다.”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뒤로도 아버지는 지난 이야기들을 종종 꺼내시는데 그때마다  울먹이신다. 이제 그만 하시라고 진짜 괜찮다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않냐며 이야기해도 아버지는 아직도 쉽게 마음을 털지 못하시는  같다.

며칠 전 부산의 집회를 마치고 기차 타고 천안에 올라가는 중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열차 칸으로 나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설교는 잘 마쳤는지, 건강은 좀 어떤지 물으시더니 또다시 울먹이시길래 낌새를 채고 왜 우시느냐며 핀잔을 드렸다. “부족한 나 같은 사람한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렇게 우리 가정에 하나님 말씀 전하는 목회자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며 끊을 때까지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영웅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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