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다쟁이 Oct 18. 2022

나의 ‘배움의 발견’

며칠 동안 책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았다. 틈나면 예능 프로그램과 영화를 보고 싶었다. 몸에 밴 관성 때문인지, 사방이 책으로 둘러 싸인 환경 때문인지 어느새 나는 다시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다. ‘홀딱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 줄 책이 어디 없을까?’ 오락적인 요소로 가득한 영상에서 날 구원해 줄 흥미진진한 책이 필요했다. 책상 위에 쌓아둔 책들을 훑어보다 오래전에 구매한 『배움의 발견』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아주 끝내주는 책이라고 극찬하던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에 책 제목을 찾아봤더니 꽤 많은 독서 후기들이 올라와 있다. ‘괜찮겠는데.’ 거실 창 바로 앞에 위치한 민트색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아 비스듬히 누운 채 읽기 시작했다. 한 챕터가 끝나고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쯤, 식탁에 있던 아내를 보며 말했다. “이 책 재밌네, 시작부터 몰입감이 장난 아닌데.” 책을 읽느라 취침 시간이 늦어졌다. 오롯이 독서에 집중하고 싶어 주말 약속을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날 사로잡았다.


극단적 종말론과 일루미나티 음모론에 심취한 모르몬교 신앙을 가진 아버지는 공교육과 현대 의료를 불신해 자녀들의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를 동조하는 어머니는 자녀들을 아버지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딸의 선택을 반대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아버지는 딸의 선택이 불순종이며, 불순종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 겁박을 한다. 주인공 타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자신의 무지와 오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옛 지식에서 분리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오래된 가르침과의 이별은 아버지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헤어짐을 선택하고 새로운 배움 안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아버지가 가르쳐 준 시선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다.


임박한 종말론과 음모론 이야기라니. 기분 참 묘하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옛이야기지만, 아직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섬겨줄 것을 제안받았던 날 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때’에 대한 강조와 ‘거룩한 신부’란 정체성, 이스라엘 회복과 24시간 중보기도 운동,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베리칩’이라는 생소한 단어들. 예수님이 곧 재림할 것이란 긴박성이 그들을 더 각성시키고 신앙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각오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복음을 위해 받는 핍박으로 여겼고, 아직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치부했다. 그들의 신념과 다른 강사들이 초대되는 일은 드물었고, 자신들의 신앙을 더 공고히 해 줄 이들과만 왕래했기 때문에 교제권은 좁았다. 독특한 선민의식과 폐쇄성은 내부 결속력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열정적인 기도와 헌신, 섬김으로 공동체는 양적 성장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었다. 공동체의 외적 성장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증거로 삼았다.


낯선 존재로 지내야 했던 그 시절이 내 사역 기간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집에 나가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예배당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기도한 탓에 당시 내 목소리는 늘 쉬어 있었다. 출애굽의 사명을 맡은 모세처럼 그들을 새로운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은 떠나온 애굽을 그리워했다. 당신 말을 믿고 따를 만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날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깊은 우울감에 젖어들었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밤에 아내는 뒤돌아 누운 내 등을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날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 매일의 위로가 날 살리는 만나였다.


처음 3년은 생존을 위해 버텨야 했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일어났고, 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신뢰해주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수는 줄었지만, 공동체는 더 안정되고 건강해졌다. 그들과 비로소 더 깊은 소속감과 연대감, 일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임박한 종말론이 강조되던 공동체에 들어가 사역하는 동안 자주 떠올렸던 질문이다. 종말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해 그들의 시선은 현실보다 다가올 미래에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종종 오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때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있다면 주어진 현재를 더 충실히 살라고,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는 현실 도피가 아닌 일상에 대한 침투력을 높이기 마련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파했다.


주인공 타라의 아버지는 수입이 생길 때마다 임박한 환란을 대피하기 위해 비상식량과 기름을 비축했다. 공교육과 세속 학문을 반대했던 것도 곧 다가올 심판의 날 때문이었다.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던 타라의 가족은 현실의 고통에 둔감해졌다. 타라의 가정은 비밀스러운 학대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타라는 자신의 고통을 가족에게 투명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집 밖에 나가서도 타라는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디서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가기까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과거 내가 속했던 공동체는 자신들을 가족이라 지칭했다. 날 보고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호칭이 참 부담스러웠다.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사역자들은 이웃 동료들에게는 투명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늘 뭔가 감추고 있는 사람인 듯 보였다.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배움의 발견 p.312)


“날 믿고 따라와” 란 말보다는 “나도 잘 모르지만 함께 가줄게”란 이야기가 더 많이 통용되면 좋겠다. 확신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확신이 누구의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 될 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견고와 완고는 다른 것이다. 견고한 사람은 해답보다 질문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완고한 사람은 질문보다 해답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견고한 이들은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가지만, 완고한 이들은 흔들리지 않아 경직되고 썩어갔다. 견고한 이들은 의심해도 될 만큼 안전한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완고한 이들은 의심에 대해 정죄하고 비난했다. 견고한 이들이 모인 곳에는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완고한 이들이 모인 곳은 획일적이었다.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 ”정말 모르겠네 “ 란 말들이 늘 날 따라다녔다. 걸림돌인 줄 알았던 이런 생각들이 디딤돌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흔들리고 의심하고 질문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삶이야말로 단단하고 튼튼하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배움의 길 위에 서 있다.


작가의 이전글 무거운 산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