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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Oct 18. 2022

무거운 산행

한바탕의 청소가 끝나고 아내와 산책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날도 흐린 데다 곧 어두워질 것 같아 멀리 가기는 어려웠다. “우리 오랜만에 봉서산이나 다녀올까?” 아내도 좋다고 했다. 봉서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우리 아파트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산에 자주 가는 건 아니다. 꽃이 아직 만개하기 전 봄에 올랐던 뒤로 이번이 처음이니 산세권에 사는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듯하다.


등산로가 있는 112동을 향해 오르는 중에 놀이터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앞을 막 지나치던 중 퍽 하는 소리가 나길래 뒤를 돌아보았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여러 차례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아이에게 소리쳤다. “야. 왜 그래? 왜 때리는 거냐?”라며 다급히 말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길질을 하는 아이와 맞는 아이 모두는 2학년이었고, 때리던 아이는 5학년 형과 함께 왔다가 놀이터에서 만난 다른 아이와 감정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너희 친구들끼리 이렇게 싸우면 되겠냐? 그리고 폭력을 쓰면 안 되지”라고 말하자 둘 다 “우리 친구 아닌데요”라며 정색한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면 당연히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옆에 있던 5학년 아이는 “우리 아빠가 당하고만 살지 말라고 했는데요”라고 말한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아빠가 아이한테 그렇게 가르쳤다고 생각하니 황당했다. 내가 떠나고 난 뒤 또다시 다툴 것 같아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산에 올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길질을 하던 아이와 위축된 모습의 또 다른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당하고만 살지 말고 되갚아 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아이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방금 전의 상황은 일시적인 것이었을까. 내가 나섰기 때문에 당장의 싸움과 폭력은 그쳤겠지만, 자기들만 있을 때 또 어떤 다툼과 갈등이 이어지고 있을까.


산을 다녀왔는데 아직 목표로 한걸음수를 다 채우지 못했다. 집 앞 주차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산 둘레를 돌아가는 길이라 한적하고 조용하다. 매주 목요일마다 허리 치료를 받으러 갈 때 이 길로 걷는데 잠깐이지만 숲 속 오솔길을 지나는 기분이 든다. 걷다 보면 백석중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그런데 계단 바로 옆에 잘 단장된 길이 보였다. 언젠가 ‘이 길은 어떤 길이지’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여기로 한 번 가볼까?” 처음 걷는 길인데 걷다 보니 왼편에 성모 마리아로 보이는 작은 동상도 보이고, 길가를 수놓은 장식물도 눈에 띄었다. 그 바로 옆에는 맨발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자갈을 깔아놓은 길도 있었다. “이런 데가 있었네. 생각보다 잘해 놨는데” 아내는 혼자라면 가보지 않았을 길을 나와 함께여서 와볼 수 있었다며 새로운 길을 알게 된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길은 호반 아파트 앞 약수터 쪽으로 이어졌다. 백석중을 지나 백석초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조금 전 만났던 아이들 생각이 났다. 그 녀석들 집에는 잘 들어갔을까. 오늘 일을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했을까. 부모는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아파트 출입문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비단 오랜만에 산을 올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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