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부대에서 근무한 지 8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입사할 때 가졌던 초심이 많이 희미해졌고, 익숙해졌고, 슬럼프도 겪고 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나를 지지해 주는 감사한 곳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직급이 있다. 병동 간호사는 모두 같은 직급이지만 외래는 7급, 9급 이렇게 2개의 급수로 나뉜다. 모든 7급은 9급이 되길 희망하고 급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채용과정에 의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나는 외래병동 7급 간호사다. 작년에 비정규직 9급으로 근무하며 정규직을 노렸지만 원하던 자리가 나지 않아 다시 정규직 7급으로 근무하는 중이다. 9급으로 승진을 해야 하는 이유를 대라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7급 위에 9급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태도지만, 부끄럽게도 그랬다.
얼마 전 산부인과에 9급 자리가 났다. 입사 8년 만에 처음 공고가 난 귀한 자리라 대부분의 동료가 지원을 했다. 3명을 모집했는데 2명만 합격소식을 받았다.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아 실망했지만 내 길이 아니라는 뜻이려니 했다. 나머지 한 명을 뽑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더니 엊그제 갑자기 합격메일이 온 것이다. 흐음....
나는 재주가 뛰어난 편이 아니다. 재주는 '무엇으로 또는 무엇을 잘 만들거나 다룬다'는 뜻으로 보통 손재주, 말재주, 글재주로 쓰이는데 특히손재주는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그런데 혈관 주사를 놓을 때, 간호사에게는 손재주(감각)이가 필요하다.
물론 해부학적 위치를 다 알면 혈관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정확히 찔러야 하지만,그것도 손의 감각이 좋아야 성공확률이 높다. 나는 심각하게 손의 감각과 재주가 없다. 그래서 간호사의 역할에서 실무인 액팅보다는 업무일정 조정, 의료진, 환자와 소통을 하는 차지 역할이 좋다.
그런데 산부인과는 기본적으로 모든 환자에게 혈관주사를 놓고 손의 감각으로 자궁의 열림을 확인하는 등 액팅의 업무가 대부분이다. 나의 적성과 영 안 맞는 일이다. 그런데 왜 지원했을까? 솔직히 '승진'이라는 명예, 외부의 시선과 평가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가 즐길 수 없는 건 자명하지만 어쨌든 승진은 하는 거니까. '나의 즐거움 vs 타인의 시선'이라는 두 선택지에서 부끄럽지만 나는 거세게 흔들렸다. 하루만 생각해 보자. 그리고 하루동안 자문자답의 시간을 가졌다.
1. 산부인과에 가서 근무하는 너를 상상해 봐. 1달 후 너는 어떤 모습이야? 2. 내일 9급으로 출근하는 날이야. 지금 네 마음이 어때? 3.1년 후의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4. 안타깝지만 너는 불치병에 걸렸어. 1년만 살 수 있는데 무조건 일은 해야 해. 산부인과 vs 외래 어디서 일하고 싶어?
결론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특히 4번 질문에서 확신이 들었다. 죽기 전에도 꼭 일을 해야 한다는데 '산부인과'를 간다?, 죽는데 그깟 명예가 뭐라고. 더욱 내가 즐길 수 있는 걸 해야지.나는죽기 전날 일을 해야만 한다면 병원에서의 간호사가 아닌,간호사로서 진로강의를 할 것이다.
인사과와 산부인과 수간호사한테 거절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여라.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떠들더니 아직도 타인중심 사고의 틀을 완벽히 깨지 못했단 말이냐. 보내기를 누를 때'시원 섭섭함' 이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니 후련함만 남았다. 다시 한번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