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린 시절, 어른들의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던 나는 30대가 되어서도 비슷한 질문 앞에서 답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진로를 고민할 때 우리는 늘 이 질문에 매몰된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을 내리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돈이 될지를 치열하게 계산해내야만 한다. 문제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부와 취업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전력질주하느라,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고 키워낼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취업이라는 숙제를 끝내고 미군부대라는 안정적인 울타리에 자리를 잡았을 때, 역설적이게도 나는 더 깊은 막연함에 빠졌다. 생활은 평온해졌지만 정작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막막함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블로그였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삶에 여유가 생기니 내 경험을 정리해서 세상에 알려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콘텐츠를 만드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느껴보지 못한 충만함을 맛보았다. 내 사소한 기록이 누군가에게 가닿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험은 내가 그토록 찾던 '나다운 삶'의 힌트가 되어주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이 즐거움의 실체는 최근 읽은 책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의 한 문장을 통해 명확해졌다.
가끔은 수동태야말로 훨씬 적극적인 능동의 의미를 담아낸다고 생각하는데 '어디 어디에 쓰인다'라는 말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쓰이고 싶은지, 지금 쓰이는 방식에 동의하는지, 어떻게 쓰이고 싶은지를 자주 생각합니다.
-최인아
이 문장을 읽고 지난 10년 동안 내가 찾던 답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쓰이고 싶은가'라는 수동형의 질문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인다'는 말은 단순히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성취감을 맛보는 단계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내 노력의 결과로 내가 몸담은 곳이 조금은 나아지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10년 전 무작정 나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그 활동들은 사실 나라는 도구가 세상에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쓰임은 이제 일상에서도 확인된다. 직장 동료들이 자신이나 자식의 진로 고민이 있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나에게 의견을 구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내 경험을 나누고 동기를 부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의 진로 고민을 해소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로 쓰일 때 가장 큰 존재 가치를 느낀다.
질문을 바꾸면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지만, '어떻게 쓰일 것인가'라는 질문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번듯한 결과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이 세상에 닿는 가치에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자신의 쓰임에 만족하는가? 만약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자.
나는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싶은가?
그 대답 속에 당신이 그토록 찾던 진로의 진짜 힌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