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것
닷새만의 노동이 끝나고 젖은 휴지 조각 같은 몸을 이끈 채 지상의 찬란한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불안과 고뇌가 몸 깊숙이 베인 채 발을 내디뎌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집을 향해 쓸쓸히 걸어간다. 삶이란 으레 눈을 뜨고 눈을 감기까지 건조하고 텁텁한 공기 속에서 그저 그렇게 낡아버린 잿빛 가득한 회중시계를 소모하는 것. 눈꺼풀이 감길 때까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닳게 할지 생각하며 개인들은 자신을 마멸해 간다. 육중한 몸속에 마모되어 가는 영혼에겐 연속된 삶의 시간이 주어지기에 갑자기를 동반하는 카프카적 해석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눅진한 몸을 이끈 채 지루함에 찌든 그들은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못하는 그늘과 빛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면 된다.
율 또한 그들 중 한 명으로서 학점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내리쬐는 여름의 빛과 간헐적으로 내리는 여우비를 피해 대학교 강의실로 들어갔다. 모호한 날씨만큼이나 애매해진 소매길이를 자신의 미래에 재보면서 한숨만 길어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버튼만 누르면 켜지는 저 에어컨과 인스타 속 하트 누르기란 사실에 허무해지고 만다. 그러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삼성에서 인턴 수료를 맞혔다는 이야기와 토익 900점을 해냈다느니 이번 여름학기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율은 언제부터 인생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라던 희망 가득했던 강연사의 말과 멀어진 채 스펙 쌓기가 안 하면 안 되는 숙제가 되어버린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지난여름 학기를 여름 끝자락을 둔 지금에야 생각해 보는 데 사용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시간이 유용하게 쓴 시간보다 더 많았다는 것을 느끼고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율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널브러진 옷과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화장품을 보며 오늘의 아침을 빠르게 치워나간다. 청소를 끝낸 후 한숨을 돌리며 옆을 보는데 잡동사니를 모아둔 흰색 정리함이 눈에 보인다. 정리함을 여니 중3 때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던 물감과 여러 미술 도구가 고스란히 그 모습 그대로 있다. 흰색이 보이지 않는 유화물감부터 시간의 흔적이 끼여 갈라진 사선 붓까지. 율은 퍽퍽해진 지금과는 다른 과거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꺼내 책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가락 모양 그대로 눌러져 살짝 찌그러진 튜브형 물감과 시간이 지나도 드는 게 어색하지 않은 붓과 그리고 압축되지 않아 거친 도화지는 따뜻한 입김을 허공에 불어 보내는 홍차와 잘 어우러져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언제부터 이런 편안함을 잊고 각자의 길을 찾아 스쳐 지나가길 반복하는 회빛 지하철 같은 인생을 살게 된 걸까를 생각하며 서슴없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형식적인 이야기들만 반복하게 된 대학 생활과 녹록지 않은 막연한 미래를 코발트블루에 섞었다. 늘 해결해야 할 문제만을 보여주며 답을 내놓지 않는 아침 뉴스 같은 대학교 시험은 율을 압박해 왔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웅얼거릴 수 없는 그러나 아직은 덜 익은 복숭아 같은 한 떨기의 20 대란 단어는 율에게 혼란만을 주었다. 모든 걸 책임지기엔 율은 아직 너무나도 어린 존재였다. 율은 홍차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마음속 깊이 넘겨둔 채 더러워진 팔레트를 닦기 위해 붓을 물통 속 물 안으로 넣어 듬뿍 묻혔다. 팔레트에 서로 섞이고 얽힌 물감들이 생각과 함께 희미해져 갔다. 수많은 물감 중 자신은 무슨 색으로 타인에게 보이고 어떤 색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선택의 순간에 선택하지 않아 이젠 나와는 무관해진 저 옆 색깔로 옮길 수는 없는 걸까 저 멀리 보이는 사랑받는 그리니 쉬 옐로우 컬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팔레트를 씻는 동안에 뭉개지는 시야를 발견하곤 들고 있던 붓의 모를 팔레트에 찌그러트렸다.
그러다 옆에 있는 잿빛 색이 되어버린 물통을 보곤 율은 물을 비운 후 새로운 물로 물통을 채워왔다. 그리곤 골드 옐로우 한 방울을 붓에 묻혀 물 표면에 살짝 떨어트렸다. 금빛을 띠는 따뜻한 옐로우가 물통 속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 순간 율은 수억 년을 살아온 지구에 비하면 저 물감 한 방울처럼 인간의 삶은 턱없이 빠르게 퍼져나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과 함께 그 잠깐에 인간은 시간을 써서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세상의 경험으로 자신의 물통을 아름답게 채워나가는 것이며, 어찌저찌 살다 보면 검은색 물감을 만나 물통 속이 더럽게 될 수도 있겠지만, 기껏 채워왔던 시간과 경험 그리고 수많은 감정이 원래의 아름답던 색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빼내려고 애쓰기보단 자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