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을 겪으며 인생의 변곡점을 그리다.
회사의 구조조정, 수습 종료, 이별.
이 모든 단어들이 30대를 처음 맞이한 내게 연달아 찾아왔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에게 자꾸만 묻게 되었다.
“지금, 너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아니... 아닌 것 같아.”
스물아홉을 기점으로 찾아온 연이은 실패들은
나를 점점 작아지게 만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흐릿해졌고
그때부터 불안이라는 감정이 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문득, 스물아홉이 되기 전엔 안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때는 이렇게 깊고 심각하게 인생을 살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기회는 무궁무진해'
'앞으로는 더 잘 풀릴 거야'
어쩌면 지금의 내가 보기엔 다소 철없었던 그 생각들이
그땐 나를 지탱하는 막연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스물아홉, 처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된 건 구조조정 때문이었다.
“회사는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억울했다.
나에게 현실은 달랐다.
여러 차례의 인력 감축이 이어졌고, 결국 마지막 전체 구조조정 때 나는 스스로 퇴사를 선택했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해고 자체가 아니었다.
어제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동료가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는 걸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에게 뭐라고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 이후로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친했던 동료가 떠나는 순간이
지나치게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람 사이에 벽을 두게 됐다.
한두 명만 가까이 두고, 그 외엔 철저히 선을 긋는 방식으로 회사를 다녔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는 다 그렇게 선을 긋고, 적당히 친한 척하며 살아가는 거야. 그게 현명한 거고, 살아남는 방법이지“.
하지만 나는, 사람을 가려가며 가식적으로 대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진심 아니면 0'이라는, 바꿀 수 없는 성향을 가진 나에게 그 방법은 애초에 맞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고용불안'이라는 말이
머릿속이 아닌, 가슴 한가운데 박히기 시작한 건
구조조정의 경험 이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건 회사도, 가족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이라는 걸.
그 뒤로는 취업 시장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회사의 규모와 무관하게 구조조정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정년까지 보장받는 직장이
과연 지금의 시대에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이직을 준비한다.
이제는 회사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이 회사에서 잘린다면,
나는 무엇을 얻고 나오는 걸까?"
명예, 돈, 워라밸, 성취감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다.
누군가는 “월급이 다야”라고 말하며 그걸로 자신의 꿈을 쌓아가기도 한다.
그것도 충분히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성취감'이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내 역량과 강점을 살릴 수 없다면
그 회사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회사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가 회사를 고르는 기준이 분명해졌다.
물론,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내 선택지도 또 바뀔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성취감'이라는 기준을 중심에 두고
매일 불안과 함께 공존하며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불안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그것이 나를 멈추게 하기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있다.
불안과 함께 숨 쉬는 법을
나는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