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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Nov 22. 2021

냉장고 1-냉장과 냉동과 실존의 차이

냉장고, 실존, 냉장고 고장, 음식 저장, 이별, 부패, 음식, 수필


냉장고가 고장 났다.  

음식이 썩어가기 시작한다. 초파리가 생기기 시작하고  냉동실에서 영원할 것 같던 음식은 이틀 만에 쉰내를 풍기고 부패하기 시작한다.

내 머릿속은 온통 냉장고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하다.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볼일을 볼 때도....


냉장고에 둔 음식에 냉장고 냄새가 밴다.

냉장고에 대한 생각이 나를 먹기 시작해서 냉장고가 나를 다 먹어간다.

일주일 만에 수리기사가 왔다 리니어 펌프가 문제이니 그걸 갈면 된다고 하고 갔지만 바람은 살짝 차가워졌을 뿐 냉장만 가능하고 냉동은 불능이다.

냉장은 가능하고 냉동은 불능이다.

불능이다.



물에 넣어먹던 시원한 얼음이 더 간절해지고 목만 탄다.

며칠 만에 기사가 다시 왔다.

메인보드 문제일 거라고 보드를 갈고 갔다.

이번엔 냉동을 비롯해 모든 작동이 정상이다. 천국이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니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나는 원래 천국에 살고 있던 걸까?

어쩌면 우리는 천국에서도 불평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불평을 안 하는 사람만 천국을 가는 걸까?

천국과 지옥을 일주일 만에 오간다.


다시 고장 났다.


기사님께 단단히 따질 생각이다.

기세 등등하던 내게 기사님은 오자마자 둘러보더니 냉장고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기사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고 싶은데 하소연을 한 세네 시간 퍼붓고 싶은데 기사님은 다음 일정이 있다고 바로 매정히도 총총히 가버리신다.

바짓가랑이라도 매달리고 싶은데 이렇게 쉽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가신다.

몇 번 더 오셔도 괜찮으니 냉장고만 고쳐주시라고 말하고 싶어도 사형선고를 내린 의사 앞에 난 속수무책인 말기암환자다.


지옥이다.


내가 냉장고 속에 있는지 냉장고가 내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2021,10,02   


ps. 내 주변에 냉장고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내 주변에 묵묵히 서 있어줬지만 그의 그녀의 존재는 부재 시에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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