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독서] #1.싯다르타/헤르만헤세

by 소리를 삼킨 기록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법륜스님이다.

그래서 불교를 좋아하게 됐고, 싯다르타를 소설로 풀어쓴 이야기가 궁금했다.

법륜스님의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졸업하고 부처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좀 더 객관적인 잣대로 소설책 읽듯이 읽었다.


이 책은 부처님 이야기는 아니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고 싶은 '싯다르타'가 그의 제자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고행과 향락의 맛을 직접 겪은 후에

비로소 부처님의 편안한 미소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싯다르타의 첫 여정에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했으나,

그는 결국 친구도 떠나 홀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깨달음이 완성되었을 때

우연히 친구 '고빈다'를 만나게 되고,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 친구는

'싯다르타'가 깨달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신을 위해 한 말씀 들려주기를 청한다.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그러나 그 죄인이 언젠가는 다시 브라흐마가 될 것이고, 그 죄인이 언젠가는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고, 부처가 될 거야. 그런데 이걸 알아 두게. 이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야! 그 죄인은 불성(佛性)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 죄인은 어떤 하나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비록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달리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지.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야. 그 죄인의 미래라는 것은 모두 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네. 자네는 그 죄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자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고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어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이지. 나를 후원해 줄 뿐, 나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 밀리의 서재




내용이 실로 철학적이다.

요즘 내 마음을 괴롭히는 사건에 이 내용을 빗대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요즘 회사에서 나에게 새로운 빌런이 생겼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후임인데

반존대를 섞어가며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느껴진다.


알면 알수록 골때리고 조심해야할 인간이라는 생각에

느슨해진 나의 경계심을 바짝 조여주신 분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똑같이 맞대응을 해보기도 했다가

살살 달래도 보았다.

근데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이나 많은 능구랭이를 내가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웃음기 싹빼고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차분하게 사무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중심에는

여전히 분노와 증오심이 가득찼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말에 의하면,


그 능구랭이는 능구랭이임과 동시에 부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억울하게 당한다고만 느껴지겠지만 사실 나도 빌런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가 부처일수 있다.

그를 통해 깨지고 다듬어지고 단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고 내안의 빌런을 돌이켜 발견하기도 한다.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지독하게 철저히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기란

불가능하리만치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호구가 되자는 게 아니라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가장 센 사람은

적을 밟아 선 사람이 아니라

적을 내 편으로 만든 사람일 것이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억울함을 밝히면 새로운 억울한 자를 낳는다.



이해하면

품으면

억울함을 삼키면

적어도 분노와 억울함이 새로 더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기는 자가 되기보다는

강한 자가 되어보겠다.


무릇 인간 존재라는 것이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인식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생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온통 노고로 가득 찬 길고도 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인간 중생을 도와주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다 쏟으셨던

부처님을 공경하며 참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