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 공주의 남자 (2)
덕혜옹주의 남편 - 시대의 희생자
by 사립탐정 진 앤 송 Feb 17. 2026
전편 말미에 본 탐정이 조선 궁녀들이 소 다케유키 백작에 대해 퍼뜨린 온갖 가짜 뉴스들을 언급해 드렸는데 그 내용인즉슨 이렇습니다.
1. 대마도 영주는커녕, 그냥 천한 대마도 농장주인데 덕혜옹주를 강제 결혼시키려고 백작 칭호만 급조해 달아 준 것이다.
2. 애꾸눈에 키도 작고 아주 추하게 생겼으며 교양이나 인성 같은 것은 밥 말아먹은 인간 말종이라 덕혜옹주를 쥐 잡듯이 두들겨 패고 짓밟아 유산을 시키기도 했다.
3. 덕혜옹주는 남편에게 겁탈을 당해 딸을 출산했고 남편에게 하도 잔인하게 폭행을 당해 실어증까지 생기고 공포에 떨었다.
저 소문들이 진짜 악랄했던 것은 덕혜옹주의 상태야 어쨌든 소 백작은 조선 왕실의 부마였기 때문에 왕실 행사 때문에 조선에 들르기도 했는데 그런 소 백작을 직접 본 궁녀들도 똑같이 저 소문을 같이 퍼뜨렸던 것입니다.
(오른쪽은 영화 <덕혜옹주>에서 표현된 모습인데 의외로 고증에 충실하여 소 백작을 미남 배우로 출연시켰습니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백작)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백작의 결혼식 사진. 당시 국내 신문들은 사진에서 소 백작의 모습을 편집하여 지워버리기도 했으니 공주의 <일본인 남편>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도쿄제국대학 영문학 전공에 몇 개 국어에 통달한 인텔리, 게다가 서양인을 방불케 하는 꽃미남이자 시인에 화가이기도 했던 종합 예술인인 소 다케유키 백작이 공주의 남자로 부적격하다고 조선인들이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분 차이>였는데 아무리 못해도 일본 황족 남자 중에서, 공작 정도는 되는 사람 중에 배필을 골라야지 대마도 영주 따위에 백작 나부랭이가 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조선 왕실 자체가 공주의 시가, 즉 외척의 횡포를 막기 위해 3품 이상 고관대작 집안을 제외하고 4~5품 정도에서 부마를 들였으며 대마도의 영주는 조선으로부터 정 3품 예조참의의 명예직을 받아 왔기 때문에 신분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전, 8살 때 이미 고종 황제가 왕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킨 적도 있기에 신분 문제는 구실이고 일본 남자와 결혼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거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 당시 덕혜옹주는 일본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급사 등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 등이 겹쳐 조현병을 앓았고 일본의 남자 황족들도 정신병자라고 하면 당장 파혼을 당하는 판에 황족도 아닌, 망국의 공주 정도는 그런 상황이라면 결혼하겠다는 상대가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었습니다.
제정신이라면 대한제국 황녀고 뭐고 이런 혼사에 동의할 가문이 없습니다. 조현병 걸린 여자를 며느리로 받을 집안이 어디 있을까마는 소 다케유키 백작은 고아였고 거절할 힘도 배경도 없던 터라 덕혜옹주와의 결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결혼 후 소 백작의 고향인 대마도를 방문한 덕혜옹주 부부. 정략결혼이긴 하지만 덕혜옹주의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저런 꽃미남 옆에 있으니 덩달아 덕혜옹주도 고와 보이는 후광효과가 생깁니다.)
여기에서부터 소 백작의 인생이 고달파졌으니 학생으로서 학업을 하고 교수로서 강의를 하고 예술가로서 작품을 하는 와중에 조현병을 앓는 아내 덕혜옹주의 간병을 오롯이 떠맡아야 했습니다.
딸 정혜가 태어난 후에는 아픈 아내가 딸을 키울 수 없기에 육아까지 떠맡았고 그 와중에도 아내와 한 방을 쓰며 덕혜옹주의 간병을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수발을 들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는데 대뜸 들어와 끝없이 웃어대기도 하고 이야기 상대가 아무도 없는 2층에서 혼자 웃어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등 그야말로 요즘도 가족들의 피를 말리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 조현병 증상을 겪던 덕혜옹주였으나 당시 의학기술로는 정신병을 낫게 할 방법이 없었고 아내의 이런 모습을 외부인들이 알고 조롱할 것을 우려했던 소 백작은 끝끝내 스스로 간병을 했고 1945년까지 15년 동안 눈물겨운 결혼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귀족의 특권이 폐지되고 재산을 몰수당하여 더 이상 집에서 간병을 하는 게 힘들어지자 결국 1946년에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955년까지 10년 간 소 백작은 아내의 병원비를 대느라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대졸 초임 회사원 <연봉이 6,500엔>인데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월 1만 엔>이라고 하는데 이게 팩트라면 정말 보통 액수가 아니었던 터라 소 백작은 투잡, 쓰리잡을 뛰며 노력했을 듯합니다.)
왜 1955년까지냐면 10년간의 별거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덕혜옹주의 오빠 영친왕 이은의 허락으로 두 사람이 이혼했기 때문이고 부부 사이에 딸 하나밖에 없어 소 백작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집안에서는 가망 없는 덕혜옹주와 이혼하고 재혼할 것을 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 다케유키 백작과 덕혜옹주는 25년 만에 남남이 되어 불행한 결혼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에 당대 최고 수준의 에이스였던 소 다케유키 백작은 신혼 1년을 제외하고는 간병 14년, 병원비 10년으로 그야말로 비운의 삶을 살아가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야속하게도 <소 백작은 과연 덕혜옹주를 사랑했을까>가 논쟁거리가 되는 게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연애결혼은 언감생심, 집안이 정해준 혼사로 결혼 당일에야 배우자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상식이라 거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갔던 시대에 그랬던 시절에 모진 운명에 순종하여 아내의 손발이 되어 살았던 것 자체가 사랑 없이 가능할까요?
소 백작은 덕혜옹주를 향해 <사미시라>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시에서 자신의 아내를
성스러운 신의 딸
자신의 가슴에 들어와 자리 잡은 소녀
나이 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
빛나는 별 같은 눈동자와 저녁노을 같은 입술을 가진 마음 착한 아내
사랑하는 게 죄라면 벌을 받아도 좋고 같이 도망가고 싶은 사람
언제나 만나고 싶다고 외치고 싶은 그런 아내
라고 묘사했으니 이런 순애보는 요즘 기준으로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사랑입니다.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1972년에 소 백작은 옹주를 만나러 한국을 방문했으나 종친들에게 <당신 같은 사람에게 옹주를 만나게 해 줄 수 없으니 썩 꺼져라>는 문전박대를 당하며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질문을 해오면 <그 시간은 내 인생의 공백기였다>는 말만 남기며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사랑했던 사람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두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바라보며 시선을 집중할 때 본 탐정은
공주의 그늘에 가려졌던 남자 중의 남자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사랑을 실천했던 그 남자
소 다케유키를 떠올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