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오랜만에 경험한 한국의 겨울은 모질고 매서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더 매서웠다. 3달간 지내며 겪은 베트남 사람들의 사기와 무례함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한국의 정(情)을 가장 먼저 기대했건만, 귀국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건 유난히 불친절한 사람들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남자친구의 무비자 기간인 3달에 맞춰 겨우 단기 방을 임대했다. 방풍이 안 되는 텅 빈 방에 매트리스를 하나 놓고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다. 당근마켓에서 여러 생필품들을 사 초라한 생활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정말 운이 좋게도 이전에 일하던 회사 선배에게 외주 제안을 받아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이라 아직 굶어 죽을 때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남자친구는 그저 무비자로 입국한 한낱 뻐킹 미국인일 뿐이었고, 내가 우리 둘 모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나는 주말 알바를 병행하며 틈틈이 회사 면접을 보고 취업 준비를 했지만, 자꾸만 최종에서 탈락했다. 불행과 함께 집에 어두커니 있는 날이 계속되자 조그만 문제조차 눈덩이처럼 커져서 둘 다 날을 바짝 세워 싸우기를 거듭했다. 몸과 마음이 갈수록 말라갔다. 신을 믿지 않지만 그가 어디까지 밀어야 내가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잔인한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나는 늘 위만 보고 밑은안 봤는데, 생각보다 밑바닥은 정말 깊었다.
당시 알바를 하던 곳은 근처의 호프집이었는데, 하루는 청소하는 나에게 손님이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너무 열심히 하길래 사장님 딸인 줄 알았다고 하는 거다. 그날은 퇴근하는 길이 유난히 슬퍼서 훌쩍훌쩍 울며 집에 갔다. 난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할까.
당시 우리에게 과일과 채소를 사 먹는 건 엄청난 사치였다. 달걀과 흰쌀밥만이 유일한 식사였고, 어쩌다 참치캔이나 스팸을 먹었다. 어릴 적 스팸을 먹고 배탈 난 기억 때문에 스팸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칼로리도 높고 가격도 싸다며
남자친구는 스팸으로 끼니를 해결하자고 했다.
높아진 물가와 함께 베트남에서보다 식사의 질은 더욱 떨어졌다. 김치와 쌀은 내 손으로 한 번도 사본 적 없이 엄마가 보내주신 것만 먹고, 과일이나 나물 등도 이모들이 바리바리 싸주던 참으로 럭키한 내 과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불행과 배고픔에서 허우적대는 처참한 상태가 계속됐다. 너무나 배고팠고, 덩달아 급상승한 물가가 피눈물이 날 정도로 야속했다. 살이 쪄서 다이어트는 해봤어도 못 먹어서 살이 절로 빠지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일 줄은 전엔 상상도 못 했다.
그 속에서 3980원 가격의 가성비 최고인 초코파이는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베트남에서 팔던 초코파이는 쳐다도 안 보던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자주 먹게 될진 꿈에도 몰랐다. 남자친구도 내가 퇴근 후에 한 손에 초코파이를 들고 집에 오면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정은 사람에게서가 아닌 초코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 편의점의 초코파이
계속해서 도전하던 취업은 이번에도 불합격하면 진로를 아예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이번에도보란 듯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는밥이라도 배부르게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걸.
지긋지긋한 초코파이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많이 먹었다. 내 전공으로 구직하는 걸 포기하고 집 근처의레스토랑에 정규 직원으로 취직했다. 부끄럽지만 '식사 제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서 지원했다. 끼니가 해결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동을 하니 우울한 생각도 잊혀갔다. 무엇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남자친구와 싸울 일도 부쩍 줄었다. 열심히 발품 팔아 홍보를 한 덕분인지 외주도 가끔씩 들어왔다. 좋은 대학교를 졸업해 이렇게 지내는 게 한편으론 큰 자괴감이 든다는 것 빼곤 상황은 이전에 비해 조금씩 나아져갔다.
좋은 직장을 찾긴 어려울지라도 한국에서 돈 벌기는 나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그저 무비자로 입국한, 아무런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외국인이었다.
나는 늘 그가 미국이라는 가장 강력한 여권 파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워킹비자를 받질 않는지 답답해 물어보곤 했다. 그는내 질문에 그저 본인은 회사가 자신을 컨트롤하는 상황이 싫다(?)며 질색했는데, 그것은 내 생애 겪어본 것 중 가장 자존심 센, 세상물정 모르는 답변이었다. 이 자식아,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그러나 이 대답은 사실거짓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