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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ug 18. 2024

1. 우연에 기대어 의미를 찾는 것

   


 그렇게 입시반 강사가 되어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지만, 유일한 비정규직이던 나는 얼마가지 않아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받았다. 곧바로 맞이한 하필이면 긴 추석 연휴는 가혹했다. 나는 늘 좋아하는 것이 명확했고, 내가 추구하는 삶에 거침없이 뛰어들며 살아왔다. 호주에서 귀국했던 것도, 회사 재취업이 아닌 미술강사가 된 것도 모두 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급여 내역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 27년의 삶이 송두리째 회의감에 빠져 어쩔 줄 몰랐다.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했다. 그리고 죽은  일주일 내내 잠만 잤다.


 우울과 함께 침전하고 있던 나는 돌연 베트남으로 여행을 결심했다. 워킹홀리데이 시절 자주 먹던 쌀국수가 주는, 그 시절의 치열함에 대한 향수 덕분일까, 아니면 대학시절 봉사활동하며 좋은 추억을 쌓았던 그 나라의 아련함 덕분일까? 내 도피처는 엉겁결에 베트남으로 정했다.

그렇게 나는 배낭(같지도 않은 책가방) 하나를 메고, 베트남 하노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몸을 실었다. 내 인생의 강력한 터닝포인트가 그곳에 있지 않을까 조심히 기대하면서.

 45일간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베트남은 편도행 티켓과 숙소만 예매하면 여행 준비가 끝나는, 나 같은 의욕상실 백수에겐 너무 훌륭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혼자 늦잠 자고, 낮술 먹고, 털레털레 구경하며 하루하루가 흘렀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여전히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해야 할까, 복잡했다. 옆나라 라오스나 태국에 가볼까. 인도네시아를 가볼까. 중국을 갈까. 온갖 생각을 했지만,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리턴 티켓을 샀다. 야속하게도 리턴 티켓은 10만 원도 안 되는 초저가였고, 값싼 그 숫자가 '이게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하노이에서 무작정 기차 티켓을 사고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렸다. 그곳은 동허이라는, 현지인들에게도 생소한 촌동네였다. 왁자지껄하던 하노이와 사뭇 다른 이곳에서 며칠을 배회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귀국을 일주일 앞두고 도착한 마지막 여행지 호찌민. 나는 호찌민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좁은 골목길의 호스텔로 향했다. 이동하느라 지친 하루의 보상으로 맥주 하나를 턱 까고 로비에 앉았다. 베트남을 여행하는 동안 쭉 혼자서 고독하게 여행했던 탓에 누군가와 시답잖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때마침 한 인도 친구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그의 옆엔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며 이따금씩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던 미국 친구가 있었다. 나와 그 미국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미국인은 코로나로 사업을 접고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참 부담스럽게도 그는 매일 내게 말을 건넸다. 미국인 특유의 해맑은 외향성이 부담스러운 데다 경계심을 풀지 않던 나는 그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끈질긴 그의 노력들(?) 덕에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처음의 날 선 경계심을 조금씩 허물었고, 우울했던 그동안의 감정들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이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말미에는 그와 만난 지 마치 석 달은 넘은 듯했다. 나는 그가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 눈치챘고, 다른 친구들과 다 함께 펍에 갈 때도 그가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출국 전 날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날을 기념하자며 부이비엔 스트리트의 한 루프탑으로 나를 데려갔다. "진짜 가기 싫다." "그럼 가지 마!"라는 식의 대화만 오갈 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쉽고 숙연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좋은 꿈을 꾸다가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다가오는 아침을 부정하고 싶은 이불 속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덮쳐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내치려 나는 테킬라를 연거푸 마셔댔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 뒷자리를 내주며 마지막으로 시티 투어 가이드를 자처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데이트였지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 떠나게 되면 영원히 못 볼 수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묘한 느낌의 '유사 데이트'였다. 혼란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동물원 구경을 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덧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다. 난 아쉬움 반, 오토바이를 타고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에 홀가분함 반, 꼭 다시 오리라는 결의도 다졌다.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위해서 이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인 듯 말했다. 진심이 묻어난 그의 말에 말없이 웃으며 나는 비행기 편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을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내가 탈 비행기 편이 공항 스크린에 뜨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와서 지연되거나 취소됐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다시 확인한 내가 탈 비행기는 바로 어제, 내가 테킬라를 쭉쭉 들이키던 그 시간에 이미 한국으로 떠났던 것. 날짜를 착각하고 하루가 지난 다음날에 이미 어제 떠난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오는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 날짜임을 확인하자마자 그와 나는 눈을 마주친 채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가 가는 게 많이 아쉬웠는지 꼭 지금 돌아가야 하는 거냐는 말만 며칠 동안 수십 번을 말했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한국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다, 내가 넘어질 뻔하면 이것 또한 한국 가지 말라는 뜻이다, 쌀국수 먹다가 매운 고추가 목에 걸려 켁켁대도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면서 염불을 외던 자신의 소원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루어진 순간이 아닌가. 그 모든 순간에 난 그저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정말 이 모든 것들이 필연인 것만 같은, 아니 필연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공항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거짓말처럼 비가 갰다.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지만, 나는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결말이 예상되는 뻔한 드라마에서 뜻밖의 새로운 전개가 시작될 때의 느낌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호찌민에서 약 2시간 반정도 거리의 붕따우라는 섬에 놀러 가자. 베트남에서 해변이라곤 유령 도시 동허이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똥물 바다만 잠깐 거닐던 기억뿐이었는데, 섬, 해변, 바다라는 단어에 단박에 GO를 외쳤다.

평화로운 섬 풍경 속에서 처음 배운 오토바이

 그렇게 난 예상보다 더 길게 베트남에 머물며 그와 함께 여행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오토바이를 배웠고, 그가 소개해준 미국의 다양한 음식들을 먹었다. 매일 밤 철썩이는 바닷소리와 실렁실렁 부는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은퇴한 배불뚝이 미국 아저씨들이 예쁜 커플이라며 사준 맥주를 얻어먹었고, 자연스럽게 눈을 뜨며 나른한 아침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원액으로 들이키는 듯했고, 언젠가는 끝날 그 순간들에 서글펐다. 이틀만 지낼 예정이었던 붕따우 섬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우린 비행기 놓친 것만 하겠어? 이것도 나중에 우리만의 에피소드가 되는 거야 라며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우리만의 추억들을 소중히 하기 시작했다.

 신기루 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한국으로 출국하는 공항에서 마침내 나는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떠나는 나를 보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나는 참 고마웠다. 내 인생의 강력한 터닝포인트가 우연히 호스텔에서 만난 인연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기했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날 난 우연에 기대어 의미를 찾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짓인가를 깨달았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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