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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ug 20. 2024

2. 도망자를 위한 낙원을 향하여


1편_우연에 기대어 의미를 찾는 것



 그렇게 나는 디지털 노마드를 도전해 보겠단 그럴듯한 대외용 이유와, 삐끗하면 낙오자로 찍히는 한국을 벗어나 끝까지 해보겠단 반항심, 그리고 하루빨리 남자친구와 함께 하고 싶단 대단히 감성적인 이유로, 관광비자 서류의 잉크가 마를 틈 없이 베트남으로 다시 떠났다. 취미로 몇 년간 운영하던 블로그와 내 전공 디자인을 살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 무리 없이 외국, 특히나 물가가 저렴한 베트남에서 충분히 생활이 가능할 거라 쉽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모아둔 돈이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그 돈을 다 쓰고 돌아오는 것뿐이지, 결국 나에겐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베트남 다낭으로 다시 입국했다. 남자친구는 베트남에서 이미 장기간 지내고 있었기에, 그곳의 문화, 정치, 사람들 성향에 대해 면밀히 알고 있었다.


다낭에서의 한 때

 나는 갓 외국에 살게 되서인지 조금은 들뜬 상태였다. 늘 낙오자가 되면 안 된다는 강박에 무엇이든 열심히 했음에도 불안함에 허우적거리던 피로한 인생에서 벗어난 이런 경험은, 특히나 여행에서 만난 운명 같은 남자친구와의 모험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와의 여정이 한 편의 영화 같았고, 여느 영화처럼 해피 엔딩이 기다리겠지란 막연 생각을 했다. 가끔씩 그와 다툼을 하더라도 까워지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행복했다.



베트남에서 맞이한 생일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생은 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기대를 품고 매일 포스팅하던 블로그의 수입은 고작 몇 푼 뿐이었고, 경력 짧은 초년생이 프리랜서로 일감을 따내기란 참 힘들었다. 게다가 영어 선생님이던 남자친구의 직장 구하기마저 희한하리만큼 불운이 따랐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도시로 가보자'며 잦은 이동을 했다. 다낭에서 냐짱(나트랑)으로, 그리고 호찌민으로. 잦은 이동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기계 고장으로 출금한 돈을 보상해주지 않는 은행에 찾아가 항의도 고, 아무 이유 없이 교통 경찰이 부당한 돈을 요구해 돈을 주기도 하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불행들 속에 남자친구는 계속해서 안정된 수입을 벌 수 없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번듯한 호텔에서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점점 위험한 동네의 초라한 숙소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꿈만 같던 베트남 여행이 나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둘 다 빈털터리가 됐고, 오토바이를 팔아 쫓기듯 향한 마지막 종착지 하노이에선 생라면만 먹고 며칠을 버틸 지경이었다. 둘 다 처음의 행복감은 잊은 지 오래였다. 자주 다투게 됐고,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졌다. 극심한 허기는 덤이었다. 물가 싼 베트남에서 며칠을 배곯며 지낸다는 사실 또한 무척 자존심 상했고, 도대체 우리의 불행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답 없는 의문만 잠들기 전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맞지만 그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그리고 나는 내 나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게 낫겠단 생각을 했다. 그가 없이.


 당시 나는 일부 돈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죄다 묶어두어 현금으로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과거의 내가 그 돈을 쓰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계획해 둔 거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그를 떨쳐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으나, 수많은 다툼 끝에 그는 너무 고집스럽고 싸움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람이었다. 점점 그와 함께할 미래가 무거운 안개가 쌓인 듯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먼저 한국에 갈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단히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내가 떠나버리면 우리 사이는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리는 그 불확실성이 싫다고 했다. 나는 그걸 또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베트남 곳곳을 함께한 백미러 하나가 없던 외눈박이 오토바이

 내 관광비자는 끝나갔고, 결국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지지고 볶더라도 한 명의 신분이라도 안전한 한국을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영 내키진 않았지만 그의 선택을 따랐다. 이 때는 한국행이 진정한 불행의 시발점이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냥 내 나라이니 뭐라도 되겠지라는 심정이었을 수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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