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육신을 끌고 다니는 건 무엇인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자고 있는 것을 아는 이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년간 내가 보고, 듣고, 느껴지는 생각, 감정, 감각을 '나'라고 믿었다. '나'로 분리된 개체로의 환상에 빠져 살던 삶이었다.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실은 이 분리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쪽과 저 쪽을 둘로 나누는 분리감은 보이는 모든 것에 상대적인 위치성을 부여한다.
상대적인 위치성은 즉시 우리에게 비교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비교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우리는 열등감, 죄책감, 분노, 수치심 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년 시절, 여자 아이들 사이에 한창 마론인형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어서, 새로 산 인형을 학교에 갖고 와서 친구들 앞에서 옷도 갈아입히고, 인형 머리를 치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아이도 있었다.
나는 하나도 갖지 못 한 인형을 몇 개나 가진 그 아이가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 인형 하나 사줄 수 없는 우리 집 상황도 원망스러웠고, 아래로 줄줄이 셋이나 있는 동생들도 미웠다. 이유 없이 동생들 머리를 콕콕 쥐어박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맘 때였던 것 같다.
인형을 가진 친구, 인형도 사 주지 못 하는 부모님, 귀찮게만 구는 동생들.. 하나같이 나의 행복의 걸림돌이 되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을 진실이라고 믿고 미움과 원망에 빠져 있었던 어린 나를 보면서, 오색, 오음, 오미에 빠지지 말라는 오늘 노자의 말이 가슴골을 타고 마음 속 깊이 스며든다.
존재의 실상은 둘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한 물건'(一物)이고, 원효가 말하는 일심(一心)이며, 성경의 성령이다.
나란 존재는 둘로 나눌 수 없을뿐더러 상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 세계에 살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결코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렇게 분리감을 느끼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순전히 에고라는 녀석 때문이다.
이 에고는 좌뇌에서 구동되는 일종의 생존 프로그램이다.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몸이 죽게 되면, 에고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몸에 집착하게 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처럼 만족이라곤 모르는 에고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우리에게 사람 노릇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한다. 더 많이 배워서 인정받으라고 한다. 틈나는 대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귓가에서 속삭이며,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한다.
돌아보면, 지난 나의 삶도 이토록 주도면밀한 에고에게 백전백패했던 삶이었다. 애당초 진실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진실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거짓 속에서는 가능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 금세 사라져 버릴 꿈이고, 환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이 꿈인 줄 모르는 이유는
에고의 생존전략에 속아 세뇌되고 학습된 탓이다.
진실은 에고라는 거짓을 놓아버려, 진실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에고에 속지 않으면 고통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과 평화만이 내 안에 존재한다.
부디 에고의 현란한 속삭임에 현혹되지 말라.
에고에게 속는 순간, 고통의 레이스가 시작되리니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떠라. 그리고, 오직 이것 하나뿐인 삶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우린 고통 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