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차도자, 불욕영
도를 터득한 자, 스스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
무릇 도를 깨달은 자라 하면, 어떠한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림 없이 고요함을 유지하며, 늘 평온하고 세상에 거리낄 것 없이 한없이 자유로운 이를 떠올리게 된다.
깨달으면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을 듯하여, 깨달음에 대한 애달픈 갈망이 내게도 있었다. 책도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수행하면 언젠가 위대한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노자는 깨달음에 대한 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부순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겨울에 내를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럼 몸가짐을 삼가며, 얼음 녹듯이 풀어지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질박하며, 계곡처럼 텅 비어 있고, 흙탕물처럼 탁하다.”
도를 깨달은 자는 이것과 저것을 극단적으로 나누지 않고, 머뭇거리고, 주춤하고, 어려워하고, 두려우면 두려움에 떠는 존재 그 자체이다. 도는 저절로 그러함(自然)이므로 저절로 그러함에 따르기만 하면 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여, 더 좋은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신영복 선생이 그의 책 <담론>에서 소개한 지남철이란 시가 떠오른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한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있는 상대를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분별심을 시비 분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분별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집착이 나와 상대를 둘로 나누었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이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가 에고의 장난질에 속고 있었다는 것을 그와 헤어지고 불편한 마음속에 머물러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상대의 말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때론 주저앉기도 하는 있는 나 자체가 오히려 노자가 말하는 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집착과 무지로 '깨달은 자'라는 상을 쫓고만 있었다. 깨닫기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 깨달음에 대한 구함을 멈춰라. 흔들리고 주저앉고 싶은 지금 이대로 이것과 하나 된 상태 그것이 바로 도의 자리요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