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성기지, 민리백배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려야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된다.
유가(儒家)의 성인은 '인위적인 노력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노자에게 인위나 작위는 우리의 본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에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경 19장에서 노자는 성스러움과 지혜를 버려야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되고, 인과 의를 끊어야 사람마다 효성과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엄부(嚴夫)가 넘쳐났다. 가정에서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폭력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그들의 단단한 신념 덕분에 상처받고 자란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입은 영혼의 상처는 평생 아픔으로 따라다닌다. 스스로 자신만 옳다는 믿음 덕분에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다 틀린 사람들로 만들었던 그는 행복했을까. 홀로 고립되어 외롭진 않았을까.
살다 보면 소위 꼰대 소리를 듣는 이를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일단 그 다름을 문제시하는 태도를 가지기 때문에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누구와도 잘 섞이지 못한다. 심각한 공감능력의 부재도 한 몫한다.
이런 이들을 만나면 대화 훈련을 업으로 하는 나도 슬그머니 피하게 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되는 자리가 있으면 입을 다물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내려놓는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지적하는 나 또한 꼰대의 길로 들어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냥 그렇게 두면 된다. 공감이란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지사지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저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라는 인정과 수용에서부터 시작된다.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상대에게 휘말려 나도 고통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그저 마알간 눈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내 마음 안에 일어난 꼰대의 이미지도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고,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나의 생각도 나타났다 사라질 것이다.
내 마음에 살아 움직이는 하나하나를 억지로 없애려 하거나 억누르려고만 하지 않으면 원래 있었던 본래의 제 자리로 돌아간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위적인 힘을 쓰는 순간, 나의 무의식 어딘가 저장되어 계속 나를 괴롭히며 쫓아다닌다.
내 앞에 나타나 지적하고, 간섭하는 그들을 10년 후, 20년 후에 바라본다면 그저 한 장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미지를 붙잡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알고, 얼른 놓아주면 내 마음이 편안 해질 테니 극락이 따로 있겠는가.
법륜스님도 말씀하셨다. 행복은 기쁘고 즐거운 상태라기보다 괴롭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괴로움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면 매 순간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을 것이다. 분별에 의한 판단 가득한 '한 생각' 내려놓은 순간, 영원한 찰나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