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낡고 낡은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현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 중 '분배적 정의'에 가깝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얼마나 가져가야 정의로운가?'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노력에 의해 최고도로 발휘하는 사람이 더 큰 몫을 가져가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대답에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대답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감히 반론을 꺼낼 수조차 없게 만든다. 타고난 능력, 그리고 그것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게 만든 뼈를 깎는 노력을 한 사람이 그에 합당한 몫을 가져간다는데, 그런 사람에게 '그건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이다.
마약을 파는 목사와 그를 잡으려는 공무원
하지만 그런 통념은 분명하게 틀린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예로 들어보겠다. 전요환(황정민 분)은 목사의 탈을 쓴 거대 마약조직의 보스이고, 최창호(박해수 분)는 그를 잡으려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겨우 굴러가는 국산차를 타고 다니는 반면, 마약조직의 수괴는 매일 대저택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한다. 그리고 그 수괴는 심지어 한 국가의 대통령도 움직일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마약상은 그럴 자격deserve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를 잡으려는 공무원은 그가 타고 다니는 차, 그가 살고 있는 집으로 평가받으면 그만인 것인가?
'그것은 불법적인 행위로 우리가 암묵적으로 만든 규칙을 깨면서 축적한 부'라고 하면서 반론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들어 돈을 번 사람은 어떤가? 과연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민함과 우둔함, 부지런함과 게으름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든 사람에 대하여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약 상인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영민하다' 내지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을 읽을 줄 안다'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상화폐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가상화폐 투자에 실패했거나 투자 자체를 하지 않아서 벼락거지*가 된 사람에게는 '우둔하다' 또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그뿐이랴. 어떻게든 물질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부지런함'이라는 영예가 따라온다. 더 재미있는 것은 '본인이 부지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나면 본인의 부지런함을 스스로 과대평가한다는 점이다(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하나씩 자기 계발서를 내고 거기엔 자신의 부지런함을 끝없이 칭송한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리고 잔인하게도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이라는 낙인이 따라온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에 '아프리카 사람(아프리카 사람이라는 말도 지나친 일반화이지만)이 가난한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교사가 꼭 한 명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부지런함은 성공과 선으로, 게으름은 실패와 악으로 연결하는 훈련을 받았다.
모두가 능력주의를 원한다는 착각
완전히 같은 정도로 불평등하지만 지위가 세습되는 사회와 능력에 따라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사회를 각각 상상해보자. 그러니까 두 사회 모두 가장 잘 사는 사람은 1000억의 자산을 가지고 있고, 가장 못 사는 사람은 2억의 빚을 지고 있다. 두 사회의 차이라면 한 사회는 신분이 세습된다는 것이고, 다른 한 사회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지위를 성취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뿐이다. 당신이 만약 가장 못 사는 사람의 자녀로 태어난다면 당연히 노력에 따라 지위를 바꿀 수 있는 사회를 원할 것이다. 그래야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정반대로 당신이 만약 가장 잘 사는 사람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회에서 당신이 만약 성공한다면 그 성공은 오롯이 자신이 일군 것이라는 칭송을 덤으로 받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 둔 덕에 얻는 영예와 내가 일군 영광은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정도의 자산이라면 쉽게 자신의 세대에서 망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든든함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계급에서 태어나든 능력주의 사회를 원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능력주의는 이렇게 모두에게 좋음(good)을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사회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사실은 둘 다 피해자인 사회 구조
하지만 일반적인 관념과 달리 철저한 능력주의는 두 계급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친다. 우선 가지지 못한 계급에게는 빈곤과 더불어 '굴욕감'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이런 가난을 초래한 것이 전적으로 내 탓이라면 '나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 또는 '실패한 존재'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분이 단순히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똑같이 못 살더라도 '그래, 내가 이렇게 힘들지만 사실은 내가 못나서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단지 운 없게 이런 계급에 태어났을 뿐이라고.'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런 자기 파괴적인 생각은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 만들고 통합을 저해한다.
철저한 능력주의는 정반대로 가진 계급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준다. 그들의 자녀로 태어나면 부모가 시키는 것에 따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아이는 끝없이 부모와 비교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 왜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숙고는 사라진다. 고시 3관왕을 한 희대의 천재가 비참한 몰래카메라 범죄자가 되는 것(그것도 동종의 범죄로 3번이나 기소되었고, 실형을 살았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자녀 중 일탈을 자주 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받았을 자기 비하와 스트레스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죽하면 대통령 아들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겠나.
일체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신분제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가진 능력과 그에 따른 보상을 완전히 절연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재능과 그에 따른 노력이 없다면 인류 문명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는 역사가 증명했고,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한 능력과 보상의 완전한 결별은 사회의 동력을 말살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재능에 관계없이 어떤 직무를 부여하고 그 수행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피겨 스케이팅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김연아에게 농구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추첨제로 공직에 봉사할 자를 선발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메커니즘이 현대 국가와 같은 규모에서도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능력주의가 신분제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으니 신분제로 회귀하자는 주장은 더욱 아니다. 신분제 사회도 물질적으로 완전 평등한 사회 못지않게 사회의 동력을 꺼뜨린다. 또한 신분 배분의 기준을 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어떤 기준으로 배분된다고 하더라도, 현대 철학의 가장 허접한 부분을 동원해서 그런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능력주의가 공동체에 해롭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사회 구조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 뜻하지 않았거나 좋은 기회에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을 일컫는 '벼락부자'에서 나온 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더 정확히는 남들이 하는 투자를 하지 않아 갑자기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사람을 이르는 신조어이다.
** 내용이 길어져서 다음 글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비판과 토론은 언제든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