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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Oct 28. 2022

능력주의가 당신을 속이는 방법

얼마나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하다

능력주의가 당신을 속이는 방법


'끝없이 노력하라. 노력해서 당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만들어라. 대중이 당신의 서비스(또는 재화)를 소비하고 싶어 하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것이다.' 아주 달콤한 주문이다. 성공하고 싶으면 대중이 원하는 것을 하라는 뜻이다. 유튜브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브런치로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찾는 것을 더 많이 생산하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생산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능력주의에 따라 높은 생산성은 높은 임금(또는 수입)과 직결된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은 많은 것을 생산하는 사람(또는 생산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많이 팔아치우는 사람)이다. 많은 것을 생산하는 사람이, 회사 입장에서는 매출에 큰 기여를 하는 직원이,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하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주의가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이다.






자료출처: OECD, https://www.oecd.org/economy/korea-economic-snapshot/



임금-생산성 격차


위의 그래프는 임금-생산성 격차를 나타낸다. 가로축은 상위 90%와 상위 50%의 노동 생산성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나라는 2.5 정도로, 다시 말하면 상위 90%의 회사 노동자*들은 상위 50% 노동자보다 약 2.5배 더 많은 생산성을 보인다. 세로축은 상위 90%와 상위 50%의 노동 소득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나라는 2.1 정도로 상위 90% 노동자는 상위 50% 노동자보다 약 2.1배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얼마나 공평한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적은 임금이라는 철퇴를 맞아 마땅하다.


하지만 위 그래프는 대중이 속는 방향과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위의 그래프를 그렇게 해석하는 나라는 기껏해야 우리나라나 일본, 미국 정도이다). 능력주의는 임금의 차이를 생산성의 차이로 포장한다. 임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구조적 문제로 발생하는데, 생산성은 이 차이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대기업은 하청업체에 '일감'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협상에 들어간다. 하청업체는 일감을 따내기 위해 불합리한 정도의 이윤을 승낙한다. 그리고 그 피해는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피 말리는 납품단가, 다가오는 납품기일 앞에 밤잠도 반납하면서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생산성에 따른 분배를 하지 않으면 공산주의 아니냐 


단언컨대 그 진술은 사실이 아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압도적 1위 룩셈부르크(참고로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의 약 4배이다), 2위 아일랜드, 3위 스위스가 저 그래프에서 어디에 있는지 보라. 동경 45도 선(y=x 그래프)을 그었을 때 전부 그 아래에 있는 국가들이다. 즉 노동 생산성에 따른 차이가 높더라도 노동 소득의 차이는 그 보다 훨씬 낮다. 스위스는 애초에 노동 생산성과 노동 소득의 차이가 거의 없다. 스위스의 P90/P50 임금격차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1.4인데, 우리나라로 환산하자면 상위 90%의 월급쟁이가 시급 20,000원을 받고 일을 하는 셈이다.** '어떻게 명문대 나와서 대기업 취직한 사람이 중고등학교 때 공부도 안 하고 노는 사람보다 1.4배밖에 더 벌지 못하냐? 그래서 누가 공부를 하겠냐?'라고 묻지 말라. 실증 데이터 하나 대지 못하면서 '그 나라의 특수성(인구가 적다느니, 특정 산업이 발달했다느니 등의 소리)'을 트집 잡아하는 변명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임금 격차의 OECD 평균이 1.6 조차 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벌벌 떠는 공산주의는 오지 않으니까.






자료출처: OECD, https://www.oecd.org/economy/korea-economic-snapshot/


Golden Ticket Syndrome 그리고 프리미엄 매직패스


수학에서 좀 유명하다는 인터넷 강사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명문대에 가는 것은 롯데월드의 '프리미엄 매직패스'와 같다고 설명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강사가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에, 그들이 나중에 조금 더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진심에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좋게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그 '프리미엄 매직패스'를 딴 친구들은 사회에 나와서 어떤 태도를 보일까? '넌 내가 죽어라 노력해서 프리미엄 매직패스를 딸 동안 놀았으니 나는 이제 평생 너의 위에 있어도 된다'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제자에게 심어주는 것이 (강사의 본의와는 다르게) 장기적으로 그 제자를 위하는 일이었을까?


OECD는 같은 보고서에서 노동시장의 이원화가 아이들에게 Golden Ticket Syndrome을 일으킨다고 분석했다. 초등학교부터 이 악물고 12년만 고생하면 인생의 골든티켓이 주어지는데, 그리고 그 골든티켓의 위상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터인데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골든티켓의 수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정말 노력해도 골든티켓을 거머쥐지 못한 아이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얼마나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아이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배금주의 문명에 찌들어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방을 사도 브랜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밥을 먹어도 얼마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는지, 이번 방학에는 해외여행을 갔다 왔는지 아닌지로 경쟁한다. 나를 데리러 오는 엄마의 차는 외제차인지 국산차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쓰는 휴대전화는 아이폰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얼마나 소비하느냐는 얼마나 쓸 여력이 있느냐이다. 얼마나 쓸 여력이 있는지는 수입에 따라 결정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런 태도는 부정하게 돈을 벌어도 상관없다는 가치관을 부추긴다(마약과 가상화폐 거래소를 생각해보라). 옵션 투자가 도대체 우리 사회에 주는 이익은 무엇인가? 가상화폐 투자가 우리 사회에 주는 이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이익을 빼앗는 것, 더 심하게는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피가 묻은 돈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느냐이다. 비트코인으로 번 돈보다 교사의 월급은 보통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에 주는 이익을 생각해보자. 비트코인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우리 사회에 악영향만을 주는 반면,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 의사의 치료하는 행위, 예술가의 창조하는 행위는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들고 사회적 회복 탄력성을 높인다. 노동은 생산하는 행위이지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다.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 가격으로 가치를 매길 대상이 아니다.



* 노동법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은 근로자라는 말보다 노동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근로자는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그것은 친(親) 회사적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근로기준법'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노동자'에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다.


** 우리나라 현재 중위임금(임금의 중윗값)은 시급을 약 14,656원이다. 여기에 1.4배라면 약 20,518원이 된다. 참고로 평균 가동시간(주 40시간에 주휴수당 포함)인 208시간을 곱하면 중위임금은 월급으로 약 3,048,448원, (스위스의 기준으로 환산하자면) 상위 90% 노동자의 임금은 4,267,744원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치이다.


*** 글이 생각보다 더 길어져서 다음 편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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