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적 사고는 개인의 차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차원에서도 적용된다. 그리고 그 효과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그것과 같이 매우 나쁘다. 내가 한 말이 아님에도 차마 부끄러워서 글에도 옮기지 못하는 말을 5선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떳떳하게 한 적이 있다.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이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적용된 능력주의의 민낯이다. 정치가 부패하였고, 국방력이 매우 약한 나라, 궁극적으로 그 국방력을 뒷받침할 시민 생산력이 낮은 나라는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심지어 망하는 것이 다행이라거나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에 분노했지만 '논리적인 반박'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의식 저편에 있는 능력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큰 이빨과 더 날카로운 발톱이 있음을 자랑하며 다른 개체를 유린하는 행위는 동물의 습성이다. 사실 동물은 자신이 더 강함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런 행위는 동물 이하의 수준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으면 한다.
10대, 그중에서도 남자아이들이 갖는 편협함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날, 10대 남자아이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들은 투표권이 없었지만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많았고, 한결같이 지금 대통령으로 있는 자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주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는데, 이 대답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야당 당대표는 하버드 나왔는데, 여당 당대표는 지방대 나왔잖아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대답의 문제를 모를 수 있지만, 그들의 대답이 충격적인 이유는 이렇다. 첫째, 대통령 선거는 당대표를 보고 하는 선거가 아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과 정치를 논하다니 나도 한심하다. 둘째,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력과 당선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사실 더 나아가서는 학력과 능력, 그리고 능력과 실적, 실적과 명예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학력으로 뽑을 것 같으면 선거가 왜 필요한가? 수능 성적으로 대통령을 뽑으면 되지 않나. (대중을 기준으로) 판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천종호 판사도, 외과의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국종 교수도 서울대 출신이 아닌 것은 알까? 셋째, 그렇게 말하는 그들조차 아주 높은 확률로 지방대(그것도 국립은 생각조차 못 할 성적이다)에 갈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아주 미성숙한 개체가 한 말이니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좀먹으면서까지 능력주의에 목매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99.9%의 확률로 지방대에 갈 것이고, 그들이 지방대를 나오고 나면 -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든, 어떤 삶을 살아가든 관계없이 - 앞으로 엄청난 주홍글씨를 달고 살 것이 뻔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낙인을 스스로가 찍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을 향해 생각 없이 찍은 낙인은 본인의 실패 경험과 결합하면 엄청난 자기 비하를 가져온다. 이런 낙인이 공동체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을까? 이런 낙인이 기여하는 가장 좋은 효과는 지배층의 지위를 공고화 한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지배층에게만 좋은 효과이겠지만 말이다.
10대, 특히 남자가 편협함을 갖게 된 이유(1) - 전제
나는 10대들과 이야기할 때 젠더 이슈로 자주 대화하는 편이다. 10대 남자들이 가진 편협함(장담컨대 우리 세대는 이성에 대한 그들과 같은 수준의 편협함을 집단적으로 가진 적이 없다)을 이해하고 싶어서이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의 전제부터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 세대에서는 남녀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앞으로 이어질 모든 토론의 전제였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성권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권력은 (실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그들이 신봉하는 능력주의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성(family name)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가히 엄청난 구조적 권력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굉장히 하찮게 여긴다. 능력의 최고도 발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교육의 기회에 굉장히 천착하는데, '요즘처럼 학교, 학원 남녀차별 없이 똑같이 다니는 세대는 경험할 성차별이 없다'는 식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남녀 (적어도 기회에 있어서의) 차별은 없다.
10대, 특히 남자가 편협함을 갖게 된 이유(2) - 주장
그들은 교육의 기회는 똑같이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취업 시기에 군대에 가는 것을 굉장한 박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보다 기간도 엄청 줄었고, 병영 문화도 많이 나아졌으며, 심지어 요즘은 휴대전화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예전처럼 구타, 부조리가 만연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보다 본인들이 받을 수 있었던 1년 6개월의 취업 기회가 몰취 된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복무행위가 공동체에 어떤 봉사를 하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복무하는 기간 동안 이중적 노동 구조에서 여자가 얼마나 많은 일류 일자리를 가져가는지만 생각한다. 노동시장의 이원화는 이와 관련된 모든 제도를 '약탈적'으로 만든다. 병역의 본질은 국방이다. 하지만 이것이 취업과 관련되는 순간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약탈적 집단으로 분류된다. 남자들은 자신의 취업 기회가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국방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 국방 때문에 지금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웃지 못할 논리력은 덤이다.
군 가산점 제도의 허상
그들은 오직 군 가산점 제도로만 자신들의 불이익이 보전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기반한 군 가산점 제도는 능력주의 그 자체 못지않게 나쁜 제도이다. 그것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군 가산점 제도는 목적이 정당하지 않다. 국가가 군 가산점 제도를 둔다는 것은 국가 스스로가 '국방의 의무'를 보상해야 할 불이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군대는 누구에게 손해를 주고자 만든 제도가 아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해라고 생각되는 불이익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일부 세력이 그런 경제적인 부분을 부각한다고 해서 국가가 그 프레임에 끌려들어 가 경제적으로 보상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국가는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고 향유하는 공동체 그 자체이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 것이다. 국방은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교육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비상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나. 그런 신성함을 장병 월급으로 환산하여 표를 얻는 구차함이라니, 그리고 그것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다니, 더 어처구니없게도 그 공약조차도 지키지 않는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둘째, 군 가산점 제도는 수단이 적절하지 않다. 설령 당사자가 생각하는 손해가 있더라도 그것을 공무원 가산점으로 보상하는 제도는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생산가능 인구는 약 37,000,000명이다. 그중 공무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3%가 채 되지 않는다. 병역의 의무는 대부분이 지지만 3%만 실질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불이익을 보전하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무원이 되지 못한 자들은 1년 6개월짜리 부도난 어음을 들고 슬퍼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이 느끼는 좌절과 공동체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셋째, 군 가산점 제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정당화 근거들은 하나같이 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전원책 변호사가 티브이 토론회에서 '군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조직 적합도 등을 보장하는 척도이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군대를 만기 제대한 것이 어째서 조직 적합도를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그 변호사는 간부로 군생활을 했으니 군생활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군대에 가면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친구들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회사에서 면접은 왜 하는가? 조직 적합도, 친화력, 업무 수행 태도 등 정성적 평가를 하기 위해서 보는 것 아닌가? 군 가산점 제도를 찬양하는 근거는 이것과 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들 뿐이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 할당제'를 비판한다.
10대 남자아이들은 능력주의라는 타르 구덩이tar pit에 빠져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 할당제'를 비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여성 할당제는 단 두 개다. 그리고 그 할당제는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는 공직선거법에 따른 '여성 비례대표 할당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 따른 '여성 임원 할당제'이다. 심지어 여성 임원 할당제는 '자산 총액이 2조 원이 넘는 상장회사'가 모든 임원을 한 성별로만 채울 수 없게 한 법이다. 그러니 여성 임원을 한 명이라도 뽑으면 된다는 말이다. 공무원 시험에 있어서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는 '추가 합격 인원'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것조차 남자가 더 큰 이득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 남자아이들은 '본인이 손해를 봐도 좋으니,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를 폐지하라'라고 주장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타르 구덩이에는 짐승만 빠질 뿐, 사람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타르 구덩이에 빠진 동물은 모두 화석이 되었다. 능력주의에 너무 빠져 있으면 그들도 후세 사람들에게 박물관에서나 볼 구경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장면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능력주의가 그들을 이원화된 노동시장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면 그들이 두려움에 떠는 짐승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공동체를 위해 하는 제언은 다음 글과 같다.
*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가 5급, 7급 시험에서는 남자에게 불리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추가 합격 인원을 포함한 총 합격자 수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여자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고위직'이 남성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려운 시험일수록 보통 그에 따라 소요되는 준비기간이 길어지는데, 남자는 성공할 경우 얻는 보상이 높은 반면, 여자는 실패할 경우 잃는 것이 매우 크다. 그것은 결혼 시장에서의 남자 '직업'과 여자 '나이'의 위상과 연관이 있다.
** 책 한 권 분량으로 기획하였으나 요지만 추려서 다음 글에 마무리하겠습니다. 더 쓰고 싶은 내용은 중간중간에 추가하는 식으로 한 주제에 대한 피로도를 줄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