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에 해당하기 위한 '공연성'의 다음 요건은 '사실(또는 허위 사실)의 적시'이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비범죄화 논의와 대안에 관한 연구*》의 비판글에서도 밝힌 것과 같이 법률용어로서 '사실'은 일상 용어와 그 의미가 다르다.** '사실은 그게 아니야'라는 말에서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한다. 이것은 분명한 일상 용어다. 하지만 법률 용어로서 사실은 '존재와 부존재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건'을 말한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면 '허위사실'이고,그것이 존재했던 사건이면 '허위가 아닌 사실'이다. 우리 법에서는 허위이든 허위가 아니든 사실을 말해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처벌받는다. 물론 허위의 사실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더 강하게 처벌받는다.***
정리하자면 사실은 '허위의 사실'과 '허위가 아닌 사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존부의 판단이 가능한 사건)과 대치되는 개념은 가치판단 또는 의견 표현이라고 한다. 가치판단이나 의견 표현은 선악, 정부, 호오, 귀천, 우열 등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다. 이것은 사실과 달리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 중의 어딘가에 대한 문제다. 이런 가치판단과 의견 표현은 (통념과 다르게) 명예훼손을 구성할 수 없다(사실 우리의 명예는 가치판단에 의해서 더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가치판단과 의견 표현에 의한 사회적 평가의 저하는 (이것도 통념과 다르게) 명예훼손이 아니라 모욕죄로 처벌된다.
사실의 확정이 어려운 이유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치판단과 사실 적시의 문제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sharp line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혼동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추상성과 구체성 구별의 내재적 한계 때문이고, 둘째, 발화자의 의도 때문이다.
우리는 꽤 구체적인 단어도 그 의미를 확장하여 추상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도둑놈은 '남의 물건을 절취한 사람'을 뜻하는 매우 구체적인 단어이지만, '매우 양심이 없는 사람' 또는 '불한당'의 뜻으로 쓰기도 한다. 법률용어로는 이런 의미의 확정에 관한 문제를 규범성 문제라고 한다. 사실은(방금 말한 사실은 법률용어로서의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단어가 규범적인데, '사람'이라는 논쟁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단어도 확정에 애를 먹고 있다. 태아는 사람인가? 태아가 사람이 아니라면 언제부터 사람으로 인정되는가? 뇌사에 빠진 자는 사람인가? 뇌의 정지가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준인가? 이처럼 아주 간단한 문제도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발화자의 의도도 사실(이건 법률용어이다)과 가치판단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대부분 '명예훼손'의 의도가 있는 자는 일정 부분 '가치판단'을 위해 사실을 동원한다. 대법원 2020. 12. 10. 선고 2019도12282 판결을 예로 들어보자. 가해자****는 '모텔에서 피해자(군인,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발언에 내포된 의미는 '피해자가 남자 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라는 또 다른 사실이고, 그 발언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피해자의 행실이 (본인의 기준에) 올바르지 않다'라는 가치판단이다.그런 의도는 맥락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에는 '얼마나 창피했겠냐'라고 이어서 말한 부분이 그런 의도를 추정할 수 있게 만드는 표지markers이다.
결국 이런 모호함은 법원의 판단에 따라 그 구체적인 성격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데, 이에 관한 최신 판례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법원 2022. 5. 13. 선고 2020도15642 판결
동장(洞長)인 피고인이 주민자치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자는 이혼했다는 사람이 왜 마을제사에 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사안에서, 대법원은 피고인이 이혼의 경위나 사유,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 유무를 언급하지 않고 이혼 사실 자체만 언급한 것은 사회적 가치나 평가를 떨어뜨린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발언의 취지를 보면 과거의 구체적 사실을 진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산제 참석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이나 평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하였다(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 2022. 4. 14. 선고 2021도17744
피해자는 작업 도중 A(장애인, 남자)가 B를 성추행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상급자인 피고인에게 보고하였다.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성추행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A의 부친을 불러 교육을 하는 등의 조치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피고인은 법률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되고, 피고인의 상급자(대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피고인을 문책했다. 피고인은 상급자로부터 문책을 당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다. 과태료 처분은 억울하다.'라는 말을 회의 중에 하였는데, 피해자는 '자신이 제대로 된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무처리에 대한 가치평가를 저하하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다'는 이유로 피고인을 고소한 사건이다. 대법원은 '보고를 받지 않았다는 허위의 사실을 말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과태료 처분이 억울하다'는 취지의 주관적 심경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 사실의 적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비범죄화 논의와 대안에 관한 연구, 윤해성, 김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現 한국형사 법무정책연구원), 2018
**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을 산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A study on anti-criminality discussion and alternatives of defamation by public alleging facts 이다. anti-criminality는 비범죄화가 아니라 범죄에 대한 대처 등으로 쓰이는 말로 외국에서 널리 쓰이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비범죄화라는 명백한 용어 decriminalization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allege는 근거 없이 무엇을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 적시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구글 학술 검색, RISS에도 alleging facts라는 검색어로 단 한 편의 논문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facts v. allegations라는 부제의 단행본이 있는데, 이를 볼 때 서로 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 가깝다. 누굴 탓하겠나. 영문 제목도 안 보고 모바일 교보문고에서 주문을 한 내 탓이지.
***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지만 허위가 아닌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면 최고 2년까지, 허위의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면 최고 5년 형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실무에서는 허위가 아닌 사실이라면 벌금이 주로 나오고, 허위의 사실이라면 상당한 벌금 내지 징역(초범이라면 집행유예) 형을 주로 받는다.
**** 판례를 설명할 때는 피고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마땅하지만, 소송의 경과가 아닌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고인보다 직관적으로 와닿는 가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