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위해제와 대기발령이 같은 뜻?
어떤 노동자의 업무 수행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면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해고를 고려할 것이다. 근무성적이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것 외에도 회사에 대한 횡령 등으로 기존의 업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회사에 해가 되는 때에도 사용자는 징계 해고를 고려할 것이다. 하지만 징계해고는 근로기준법(내지 국가공무원법 등)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당장 업무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이때 잠정적인 인사명령으로 사용자는 해당 사유가 사라질 때까지 노동자를 직위에서 해제시킬 수 있다. 즉 기존에 하던 일에서 잠시 손을 떼도록 명령할 수 있다.
노동자가 만약 직위해제를 당했다면 출근을 해야 할까? 우리 대법원은 직위해제를 당했어도 출근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출근해서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지 궁금할 것이다. 사용자는 직무성적의 향상을 위한 교육을 명할 수도 있고, 기존의 직위와 관계없는 특별한 연구과제 등을 부여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모든 직무에서 배제하는 대기발령을 내릴 수도 있다. 많은 교과서와 변호사, 노무사, 심지어 검색포털까지 직위해제와 대기발령, 대기명령을 모두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직위해제와 대기발령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탓이다. 다음의 판례와 법률의 규정을 본다면 '논리적'으로 두 개념이 같지 않음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조차 파악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법률상담을 해준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해로운 행위가 아닐까?
대법원 2003. 5. 16. 선고 2002두8138 판결
근로자가 직위해제를 당한 경우 단순히 직위의 부여가 금지된 것일 뿐이고 근로자와 사용자의 근로관계가 당연히 종료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므로 대기발령을 받지 않았다거나 교육훈련 또는 특별한 연구과제를 부여받지 않았다고 하여 당연히 출근의무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였는 바, 기록에 비추어 살펴보면, 원심의 위와 같은 판단은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되고, 거기에 상고이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직위해제 시 출근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위의 판례를 문언 그대로 해석해 보면 '직위해제를 당한 사람은 해제 후 직무에 관하여 대기발령을 받을 수도 있고, 교육훈련을 받을 수도 있으며, 특별한 연구과제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셋 중에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다고 해서 당연히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직위해제 후 교육훈련을 명하는 것도 아니고, 직위해제 후 연구과제를 부여받은 것도 아니며, 직위해제 후 대기발령을 받지 않았다면 원칙적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국가공무원법 제73조의3(직위해제)
① 임용권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에게는 직위를 부여하지 아니할 수 있다.
2. 직무수행 능력이 부족하거나 근무성적이 극히 나쁜 자
3. 파면·해임·강등 또는 정직에 해당하는 징계 의결이 요구 중인 자
4. 형사 사건으로 기소된 자
③ 임용권자는 제1항 제2호에 따라 직위해제된 자에게 3개월의 범위에서 대기를 명한다.
대기명령은 직위해제 이후의 절차라는 것 정도를 쉽게 알 수 있다.
직위해제 처분을 받으면 노동자는 자신이 하던 직무에 종사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노동자는 심적인 부담을 안게 되는데, 보통은 이에 더하여 승급, 승호, 보수지급에도 불이익한 처분을 받는다. 따라서 직위해제는 인사상 상당한 정도의 불이익한 처분에 속하고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무효라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판례는 일견 이와 상반되는 태도를 지닌 듯하다. 대법원 '대기발령을 포함한 인사명령은 원칙적으로 인사권자인 사용자의 고유권한에 속하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상당한 재량이 부여된다'면서 '인사명령이 근로기준법 등에 위반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결하였다. 위 판결에 따르면 직위해제 등은 사용자의 재량이지만 그것이 '근로기준법 등'에 위반되면 안 된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에 인사명령과 관련된 조항은 '제23조*'뿐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이유 없이 직위해제 등의 처분을 해서는 안된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징계와 다른 절차이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무한에 가까운 재량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이것이 '상당한 재량이 부여된다는 것을 근거로 많은 직위해제를 정당화한 법원의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근로기준법 제23조(해고등의 제한)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그 밖의 징벌을 하지 못한다.
** 징계와 완전히 별개의 절차라는 판례(대법원 2006. 11. 23. 선고 2006두11644 판결)의 태도도 의문이다. 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신분상의 불이익 처분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취업규칙에 따라 징계의 한 종류라고 인정한 판례(대법원 2018. 5. 30. 선고 2014다9632 판결)도 있는데 취업규칙에 따라 징계 아닌 것이 징계가 된다는 것도 논리적 일관성에 의문을 품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