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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동법

1일 1 노동법 - 18

사용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임금 청구가 가능한가?

by 이동민

principle of private autonomy


현대 계약법은 사적 자치의 원리에 기반한다. 사적 자치의 원칙은 '계약 자유의 원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계약을 체결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계약의 상대방은 누구로 할 것인지, 어떤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 것인지, 계약을 어떤 방식으로 체결할 것인지 등이 기본적으로 계약 당사자의 자유에 기초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어떤 사람도 자유의사에 반하는 계약의 체결을 강요당하지 않고, 체결하지 않은 계약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나쁜 짓


당연히 근로계약도 계약법의 한 갈래이므로 사적 자치의 원칙이 넓게 적용된다. 사용자는 어떤 사람을 채용할지, 반대로 노동자는 어떤 회사를 다닐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사용자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자에게 임금을 줄 필요가 없듯이, 노동자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회사에 임금을 청구할 수 없다. 이걸 잘 이용하면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할 수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무자력 회사나 무책임한 사람을 끼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사용자는 무자력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그 회사에 돈을 주면 되고, 노동자는 껍데기밖에 없는 회사에 취직하여 근로기준법의 많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책임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사이에 넣어서 책임의 사실을 끊는 방법은 노동관계뿐만 아니라 코인사기, 전세사기 등에 널리 쓰이는 나쁜 짓이다.




파견과 도급


노동관계에서 이런 나쁜 짓은 주로 두 형태로 발현된다. 첫 번째 형태인 파견은 파견사업주가 노동자를 채용하여 자신이 노동력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사용사업주에 노동자를 '파견'한다. 노동자는 사용사업주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뿐, 사용사업주의 지휘·명령에 따라 노동을 제공한다. 파견된 노동자는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한 사람과 사실상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모든 파견이 나쁜 것은 아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구매한 회사는 그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의 직원으로부터 비교적 긴 기간 동안 피드백을 받을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파견이 오로지 '노동자의 처우를 부당하게 불리하게 만들고, 그만큼 사용사업주에게 이익을 줄 목적'으로 행해지면 그것은 나쁜 짓이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년을 초과하여 파견을 한 경우 사용사업주는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여야 한다.


두 번째 형태는 '도급'으로 일상에서는 주로 용역계약으로 불린다. 도급은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다. 내가 직접 건물을 지을 능력이 없으니 나는 건축업자에게 건물을 지어달라고 하고 그 대가로 돈을 준다. 이런 것이 도급계약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런 도급형태의 계약은 노동계약에서도 널리 쓰인다. 은행이 경비 업무만 따로 떼어서 '은행을 지켜달라'라는 내용의 도급 계약을 용역업체와 체결한다. 그러면 용역업체는 평소에 데리고 있던 인력을 은행으로 보낸다. 도급은 특정한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파견과 달리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특정한 일을 직접 지시할 수 없다.




도급의 문제점


노동관계에서 도급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도급의 법적 성격에 맞지 않게 '사용자가 직접 노동자에게 업무지시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내가 건물을 지어달라고 하면서 건물을 지으러 온 노동자들에게 '건축현장에서 나오지 않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지시한다면 누구나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용역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은행에 경비용역으로 일하는 사람은 동전 분류 업무를 하고, 경비원으로 용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분리수거 업무가 부여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일반적으로 용역업체는 자금상황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고, 지급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건축현장에서 특정 일을 하는 '반장'들은 자기가 같이 일할 사람들을 데리고 건설현장을 옮겨 다니면서 공사를 한다. 그리고 반장은 원청으로부터 인건비 20만 원을 받으면서 인부의 숙련도에 따라 5~7만 원을 떼고 임금을 지급한다. 이런 행태를 현장에서는 '똥떼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반장들은 원청으로부터 받은 돈을 다 써서 인부들에게 돈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나도 사무실 건물을 지을 때 당한 적이 있다).




도급사업에서의 사용자 책임


임금 횡령을 하는 반장들은 돈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특히 건설현장에서 인부들의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탓에 우리 근로기준법은 도급인(일을 주는 사람; 원청)에게 임금 지급 의무를 지운다. 도급인은 인부와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지만(나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인부 개인과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없다), 사적 자치 원칙의 예외로 임금을 지급할 의무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근로기준법 제44조

제1항 사업이 한 차례 이상의 도급에 따라 행하여지는 경우에 하수급인이 직상 수급인의 귀책사유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직상 수급인은 그 하수급인과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 다만, 직상 수급인의 귀책사유가 그 상위 수급인의 귀책사유에 의하여 발생한 경우에는 그 상위 수급인도 연대하여 책임을 진다.


어려운 말처럼 보이지만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원청이 정당한 사유 없이 하청에 약속한 돈을 제때 주지 않거나, 하청에 원자재를 늦게 공급하거나, 하청과 체결한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원청은 하청과 연대해서 노동자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원청이 돈을 제때 준다면 원청은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반장들의 임금 횡령은 원청이 돈을 제때 줘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은 건설현장에 한해 원청에게 더 강력한 책임을 지운다.


근로기준법 제44조의2

제1항 건설업에서 사업이 2차례 이상 공사도급이 이루어진 경우에 건설사업자가 아닌 하수급인이 그가 사용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 직상 수급인은 하수급인과 연대하여 하수급인이 사용한 근로자의 임금을 지급할 책임을 진다.


정확하게 반장들의 임금 횡령을 겨냥한 법조문이다. 건축주가 건설사업자에게 건물을 지어달라는 것이 1차 도급계약이고, 건설사업자가 반장에게 철근을 깔아달라는 것이 2차 도급계약이다. 이렇게 2차례 이상 도급이 일어난 경우 하수급인(반장)이 건설사업자가 아니라면 반장에게 일을 준 건설사업자는 귀책사유를 불문하고 임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 이 법률의 시행(노무현 정부인 2007. 7. 27.에 제정되어 2008. 1. 28.부터 시행되었다)으로 건설사업자가 인부들에게 직접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바른 방법'이 되었지만 건설현장에서는 여전히 반장이 모든 돈을 받고 똥떼기를 한다. 물론 임금 자체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의 병폐가 얼마나 넓고 짙게 깔려있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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