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은 정말 정의하기 힘든 단어다. 공익과 그 반의어인 사익은 관련자 수의 다과(多寡)로 나뉘지 않는다. 한 건설회사가 건물을 짓는데 도면보다 적은 철근을 썼다고 가정하자(가정이 아니라는 것이 더 슬프지만).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승리하면 그 건물 가액에 대한 보상을 받고 건설회사는 평판을 잃어 도산한다.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고 회사가 신용을 잃어 수천 명이 실직한다면 숫자의 다과로 공익과 사익이 나눠진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직관은 이런 결론을 거부한다. 공리주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공리주의가 우리 도덕의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때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는 입장은 칸트의 의무론이다. 건설회사가 철근을 10개 넣는다고 약속했는데 6개만 넣었다면 이는 단순히 계약을 위반한 행위가 아니다. 모든 건설회사가 그와 같이 행동한다면 건설업이라는 시장은 신뢰를 잃고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적은 숫자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더라도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편에 서서 하는 행동이 공익적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그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은 공적이고, 반대로 건설회사를 위해 하는 일은 사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어떤 공익이든 사익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그 건물을 사용하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일은 철저한 사익이지 공익이 아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건설회사의 편법을 규탄하더라도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공익적 행동이 되기도 하고 사익을 위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즉, 공익이냐 사익이냐는 도덕적 판단과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공익도 그 수혜를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익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 수혜의 대상이라고 해서 그가 한 행위의 공익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그 행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사익이 비교적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막대하고, 그에 반해 행위자의 사익이 결과적으로 감소한다면 그 행위를 사익에 봉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오염수의 태평양 방류를 저지하기 위하여 생업을 포기하고 집회나 시위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방류저지가 달성되었을 때 얻는 이익이 있지만 그 행위를 오로지 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소수자에 대한 공감이 있다. 소수자에 대한 공감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아니지만, 소수자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말끝마다 여자(성적 마이너리티), 지방(공간적 마이너리티), 삼류(아비투스에 대한 마이너리티)를 달고 다니는 사람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굳이 성별을 꺼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여변호사, 여의사, 여기자'라고 부르고, 본인이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대학을 '지잡대'라고 부르는 사람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삼류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면, 그 근거 없는 자의식 과잉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하는 행위라고 해서 전부 공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도덕적으로는 남밖에 비방할 줄 모르는, 그야말로 삼류가 '이것은 공적인 일이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는 행위는 공동체에 아주 위험하다. 자유라고 하는 것이나 정의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열린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해 가면서 성숙하는 것이지, 어떤 한 사람이 좌표를 찍고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건 고작해야 코끼리 수준의 리더제 개체군에서 통용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내가 옳아! 넌 왜 이런 정의로운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충고해주고 싶다. 신천지도 그들이 옳은 것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다. 남의 공간에 와서 남의 손님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행위는 신천지의 전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행위가 온라인이라고 해서, 손님에게 피해를 덜 끼친다고 해서 옳은 행위가 되진 않는다.
나도 스스로가 세상의 모든 진리와 정의를 다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브런치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일을 대가 없이 도와주곤 했다. 하지만 진리와 정의는 가변적인 것이고 그래서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불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전부 항거할 수도 없다. 내가 세상의 모든 정의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다른 사람의 무위(無爲)도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해.'라는 말에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자. 그리고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그 정보를 수용하자.
*커버 이미지는 자기가 정의로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