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 시작해서 논문으로 끝내기(1)
나는 직업상 와이셔츠를 자주 입는다. 매일 입는 와이셔츠를 일일이 손으로 빨기도 힘들어서(요즘은 바르는 세탁 세제가 있다고 하니 써 볼 예정이긴 하다) 세탁소에 맡기는 경우가 잦다. 한 번에 10벌 정도 드라이클리닝 및 다림질을 부탁하니 비용도 만만치 않다. 동네 세탁소는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많아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 나에게 세탁소 가기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친근감이 형성된 사장님이라면 모를까, "제가 현금을 안 들고 와서 그런데 우선 와이셔츠부터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통할리 없지 않은가?
우리 현실에서 유치권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는 사례는 둔촌주공이 아니라 위와 같은 세탁소 사례이다. 세탁비를 주지 않으면 세탁물을 줄 의무를 거절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 유치권을 볼 수 있는 사례는 적지 않다. 세탁물은 내 것이니 세탁소 주인이 반환 의무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그 세탁물에 대한 비용을 지급하지 않으면 세탁소 주인에게 반환을 거절할 '권리'가 갑자기 인정된다. 법률적인 용어로 우리는 이런 권리를 '인도 거절권'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권리를 '유치권'이라는 이름으로 물권(물권이 무엇인지는 아직 신경 쓰지 말자. 현실에서 물권과 물건의 뜻이 여럿이다 보니 물권과 물건을 혼동하는 사례가 많다)의 일종으로 인정한다.
사실 이런 유치권이 당연하거나 논리 필연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권리는 아니다. 사실 어떤 법도 논리 필연적이지는 않으니(사회문화적 현상에서 어떤 것도 논리 필연이라 볼 수 없으니) 약간의 과장이 섞인 말이지만,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당연한 이 권리가 다른 나라에 가면 굉장히 이상한 권리로 평가받는다. 연혁적으로 보자면 이런 인도 거절권을 처음으로 명문화한 법은 로마법이다(괜히 법이라면 로마산(産)을 최고로 쳐주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로마법을 계수한 프랑스법, 독일법도 인도 거절권을 명문화했다. 다만, 그 인도 거절권은 채권적 권리이지 우리나라처럼 물권적 권리가 아니다.
물권적 권리가 어떤 것인지는 아직 신경 쓰지 말자고 했으니 채권적 권리와 물권적 권리의 차이에 대해서 깊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대신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서 '유치권'이라는 권리가 숨 쉬듯 당연한 권리는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A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B에게 팔려고 한다. 계약금으로 1억 원을 받았고, 잔금 9억 원도 이미 받은 상태다. 등기를 이전해 주려고 하는데 A가 가지고 있는 아파트가 20억 원으로 올랐다. A는 이 아파트를 20억 원에 사고 싶다는 C에게 아파트를 팔고 등기이전까지 마쳐버렸다. A가 범죄를 저지른 것과는 별도로 A와 B 사이의 계약을 몰랐던 새로운 주인 C에게 B가 찾아가서 말한다.
"이 아파트는 원래 내 것이니 나에게 주시오."
C는 황당하다는 듯이 답변한다.
"아니, 당신은 누군데 이 아파트를 돌려 달라는 것이오?"
B는 당당하게 현관문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 보시오! 현관문에 명패도 내 이름으로 바꿨지 않소? 이미 남의 아파트라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이오?"
아뿔싸! C는 왜 진작 명패를 못 봤단 말인가? 등기부등본은 그렇게 철저하게 확인했으면서 말이다.
마치 21세 기판 석탈해와 호공(瓠公) 사이의 부동산 분쟁을 보는 것 같다. 저런 이야기가 상식적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률적인 기초지식이 없으면서, 객관적 입장에서 형평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 입장만 생각할 줄 아는 7살 어린아이라면 B의 말이 타당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B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둔촌주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와이셔츠 세탁비야 얼마 하지 않으니 줘버리면 그만이지만, 등기부등본을 열심히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권리를 보호하자고 애꿎은 사람에게 손해를 강요할 수는 없지 않나?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 유치권을 물권적 권리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스위스는 유치권을 물권적 권리로 인정하되 부동산에 대해서는 유치권을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이런 현수막은 그만 보고 싶다.
"유치권 행사 중이니 출입을 금합니다."
유치권의 문제점과 유치권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제도에 대해 교양 수준으로 시작해서 논문 수준으로 끝맺고자 합니다. 설명하는 저도 포기하지 않겠으니 다들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