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버지의 봄은 일찍 온다
아버지의 봄은 달력보다 조금 더 빠르게 찾아온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2월 말쯤이면
어머니에게 전화가 온다.
"요즘 회사는 바쁘지?
애기는 잘 자라고?
이번 주말엔 내려올 수 있겠니?"
그 전화의 진짜 의미는
‘이제 밭을 정리할 때가 됐다’는 신호다.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 무뚝뚝한 그 마음이 전해진다.
우리는 3남매다.
봄이 오면 아버지는 슬쩍, 아니 사실상 작정하고
3남매를 소환하신다.
비닐하우스 18동,
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기에는
도무지 손이 부족한 양이다.
봄이 오면 우리는 비닐하우스 밭을 정비한다.
겨우내 굳어진 흙을 갈아엎고,
퇴비와 거름을 뿌리고 다시 흙을 고른다.
작물에 맞춰 두둑을 만들고,
작물들에게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호스를 자리에 맞게 깔아준다.
그리고 마지막엔 비닐을 씌워
그 작은 세상을 완성한다.
일의 순서는 매년 비슷하다.
다들 말없이 제 일을 척척 찾아 해낸다.
이젠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새참 시간’이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신다.
거기에 간단한 과자 하나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하신다.
그 손에 막걸리 잔이 들릴 때면
그제야 비로소 웃는 얼굴이 잠깐 스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부쳐주신 따끈한 전이 상 위에 올라온다.
우린 허겁지겁 그것들을 나눠 먹는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따뜻하고 평화롭다.
농사일을 할 땐 각자 전용 옷이 있다.
촌스러운 바람막이, 군청색 장화,
그리고 해가 들지 않도록 얼굴을 가리는 챙 넓은 모자.
누가 봐도 ‘농사꾼 패션’이지만,
그 옷을 입는 순간 나는 어느새
‘농사꾼의 아들’이 되어 있다.
도시에선 일주일 내내 책상 앞에서 일하고,
비즈니스 캐주얼에 익숙해져 있지만
시골 밭에서는 흙 묻은 장화를 신고
삽을 드는 내 모습이
왠지 더 솔직하고, 진짜 나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봄은
밭에서 시작된다.
손끝에, 이마에, 그리고
가족의 발걸음 속에서 자라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