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첫 참가자가 결정 됐어. 어때? 두근두근 하지?”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던 한울은 누구보다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소파 앞에는 크기가 벽 만한 모니터가 있었다. 불투명한 모니터는 신기하게도 공중에 뜬 채였다. 마치 미래 시대를 다룬 SF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해태는 다소 떨어진 작은 책상에 앉아 한울과 똑같이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차이점이라면 90년쯤 유행하였을 구닥다리 컴퓨터라는 점이었다. 아담한 의자에 앉은 해태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이야 뻔했지만 속마음까지 같을 수는 없었다. 아니, 속마음만큼은 절대 같아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해태야-아?”
말꼬리를 늘이는 모습이 가히 심상치 않았다.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뜻하는 신호였다. 얼핏 들으면 장난스러운 말투일 수 있으나 해태는 되레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등줄기가 시원해지다 못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을 지경이었다.
눈칫밥 생활에 이골이 나 있던 해태는 한울의 심기를 기가 막히게 눈치채며 빠르게 반응했다. 이번 주인의 변덕은 밤낮이 바뀌는 것보다 빨랐다. 이럴 땐 무조건 설설 기는 것이 정답이었다.
“네네! 그럼요. 너무 두근두근해서 제가 깜빡 말하는 것을 잊어버렸지 뭡니까요.”
“그렇지?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아,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한울이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테이블에 즐비하던 초콜릿 하나가 빠르게 날아왔다. 신통방통한 일이었지만 해태는 못 본 척해야만 했다. 귀한 권능을 고작 저딴 일에 소비하다니. 이가 갈리고 눈에서는 불길이 타오를 것 같았지만 속내일 뿐이었다.
권능은 신의 고유 권한이었기에 신수인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억울함을 구제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으면 권능이 사라진다’는 거짓말을 기름칠 해놨기에 최소한 의무라도 지켜냈다. 한울이 사실을 알아도 제 목은 안전하리라. 해태는 한울을 신으로 올린 전지자들이 제 소멸을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아무렴 지금껏 모든 신을 완벽하게 보필해 온 유능한 신수가 아니던가.
“이제부터야. 드디어 시작이라고.”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 초콜릿을 먹던 한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해태가 일차적으로 선별한 명단에서 최종 여덟 명을 골랐다. 그들은 입장만 하면 되었다. 이후에는 한울의 세상에 오르는 것이다. 게임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참여는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달랐다.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이기거나, 죽거나, 한울이 퇴장 시키거나. 실상 한 가지 뿐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해태가 모니터를 뚫어지도록 보면서 물었다. 화면에는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 저마다 뼈 아픈 사연을 하소연하는 글이었다. 이제는 깨알 같은 글씨에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 봤을 때는 혀를 내둘렀었다. 여태 이런 식으로 억울한 이들을 모으는 신은 없었다. 컴퓨터라는 것도 존재한 이래 처음 구경해 보았다. 전 주인은 오백 년 전에 재물로 뽑혀 신이 되었다. 해태가 현대 문물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뭘 당연한 걸 물어? 이제야 제2의 인생이 시작하는 느낌이라니까?”
“어차피 초대장을 수락한 사람들만 부르면서 동의는 왜 또 받으시는 겁니까?”
여러모로 좀이 쑤셨던 해태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모니터라는 존재는 처음에야 신기했지, 온종일 들여다보기에는 지루한 감이 있었다. 허락도 없이 제 이름을 쓰려고 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며 소심한 트집을 노리는 의도도 있었다.
해태의 속내를 알았던 한울은 더럽게 쪼잔하다고 생각했으나 입에 담지는 않았다. 늙은 신수는 잔소리가 심했고, 피할 수 있는 똥은 밟고 싶지 않았다. 한울은 해태의 뒤끝을 무시하며 답했다.
“초대장은 생각 없이 수락했을 수도 있지만 게임 참여는 다르지. 누가 그러던데 배려에도 예의가 필요하대. 개소리지만 좆같은 권능을 쓸려면 어쩔 수 없잖아. 강제가 들어간다면 억울한 자들을 ‘돕는다’는 명목을 벗어나니까.”
인증을 이중으로 하는 이유는 권능 때문이었다. 모처럼 힘이 생겼는데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도 없었다. 한울은 다양한 전자 기기를 통해 통해 보냈다. 큰 억울함을 가진 이들만 골라 기본 조건을 충당했고, 참여자들의 의사를 존중함으로써 발동 조건을 지켰다. 나머지는 본능 싸움이었다.
“두고 봐. 저들은 분명 한을 풀 거고, 나쁜 놈들은 벌 받을 테니까. 진정한 권선징악이지.”
“권선징악은 그렇게 쓰라고 있는 말이…… 맞지요! 예, 예 그럼요. 아주 훌륭하십니다!”
저도 모르게 구시렁거리던 해태는 머리 가죽이 뚫릴 정도로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을 느끼며 황급히 말을 바꿨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번 주인은 한참 잘못 걸렸다.
한울은 해태가 말을 바꾸자마자 언제 험악하게 굴었냐는 듯 화사하고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기분 변화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빨랐다. 가장 무서운 것은 순식간에 나오는 해사한 미소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위적으로 꾸미는 얼굴도 아니었다. 세상천지에 한울만큼 가식과 먼 인간이 있을까.
포커페이스일 것 같은 한울은 의외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기분이 곤두박질쳤다가도 눈 한 번 깜빡이면 구름 사이를 둥둥 떠다녔다. 감정 기복이 심할지언정 말과 행동에 거짓은 없었다. 관점만 달리하면 한울은 진솔하며 거짓을 모르는 이였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머릿속 가득 적색경보가 울렸던 해태는 부디 세계가 멸망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다.
“해태, 해태! 이것 봐봐. 첫 번째 방에 사람들이 모두 모였어! 드디어 시작이라고.”
기분이 한껏 고조된 한울이 자리에서 방방 뛰며 해태를 불렀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 볼이 복숭아처럼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천사 같은 얼굴 너머 악마가 있구나. 해태는 참담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해태야-아? 뭐 하니-이? 이거 보라니까?”
“아이고 잠시 눈 운동 좀 했지요! 지금 갑니다!”
해태는 말꼬리를 늘리는 한울의 행태에 급히 눈을 뜨며 후다닥 뛰어갔다. 조금만 늦더라도 어떤 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지난번에는 억울한 사람들 명단을 빨리 뽑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종일 말이 되어 바닥을 기어야 했다. 한울은 생각, 아니, 마른 체구와 다르게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꼭 권능으로 무게를 늘리기라도 한 듯이. 해태는 확신했지만 그럼 뭐 하나. 입도 뻥끗 못 하는 신수 신세인데.
***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유토피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뭐야? 어디서 들리는 거야?”
범근은 스피커 하나 없는 방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리자 인상을 찌푸렸다. 온통 하얗기만 한 방은 낯설기만 했다. 높은 천장에 평수도 제법 큰 방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주변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또한 모두 초면이었다. 딱 한 사람을 빼면.
눈을 뜨니 낯선 장소에 갇힌 범근은 기분이 나빠졌다. 인테리어 하나 없이 하얗기만 한 방은 불쾌하기 까지 했다. TV에서나 보던 정신병동 같았다. 심기가 뒤틀린 범근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며 오직 한 사람만 노려봤다. 동시에 언제 화를 터트리면 좋을지 타이밍을 쟀다.
범근이 뚫어져라 쏘아보는 인물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시윤이었다. 정체불명의 방에서 유일하게 아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슨 호기로 제 전화를 무시하는지 기가 찼는데, 오줌 마려운 개새끼처럼 움츠러든 꼴을 보니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셨다. 그렇다고 대가를 받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야, 김시윤!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말고 여기가 어딘지 빨리 불어. 방금 목소리는 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누구고?”
성질을 죽이지 못한 범근이 시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서로 정체를 모르는 이상 함부로 말을 거는 행동은 위험할 수 있었다. 범근은 인상을 구기며 시윤을 쏘아봤다. 안면도 없는 사람을 족칠 수는 없으니 쥐고 흔들 사람이라면 시윤뿐이었다. 옛날부터 때려잡을 인물이라면 정해져 있었다.
“개새끼야, 빨리빨리 대답 안 해?”
“어, 어, 그러니까 나도 잘…….”
시윤은 정신이 들자마자 보인 얼굴이 범근이라 소스라치게 놀라 말이 평소 이상으로 안 나왔다. 자신을 괴롭혔던 놈들을 목 졸라 죽일 수 있다는 말에 혹하였는데, 설마하니 실물을 눈앞에 대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범근을 확인한 시윤은 본능적으로 온몸을 달달 떨었다. 오랜 세월 학습된 행동이었다.
“개새끼가 사람 빡돌게 하네? 오늘 내 전화 씹은 것까지 해서 제곱으로 계산해서 처맞을래?”
“저기, 적당히 하지?”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 올랐던 범근이 주먹을 높이 드는 순간 그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앙칼진 음성은 분명 여성이었다. 범근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긴 머리를 아래로 묶은 여성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서 있었다. 양손은 보란 듯이 허리에 올라간 채였다.
“지금 입고 있는 교복, XX중학교지? 폭력신고라도 할까? 아니면 조용히 할래?”
“하, 신고, 뭐? 저 년이 젊어서 노망이 났나! 그래! 어디 해 봐! 누가 겁낼 줄 알아?”
범근은 위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어른들이라면 질리도록 보아온 터였다. 고작 나이 든 여성에게 벌벌 떨 만큼 멍청하지 않았고, 싸움이 나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약하고 늙은 주제에 어디 함부로 참견하는지 웃기지도 않았다.
“허? 좋아. 이곳을 나가는 대로…….”
「자자, 싸움 구경이 재미있기는 한데 그쯤 하고 게임 진행 좀 할까?」
범근과 여성이 본격적으로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한울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규칙을 설명하지. 내가 내는 퀘스트를 수행 하…….」
“좆같은 님아? 멀리서 주접떨지 말고 상판대기 좀 까죠? 규칙은 개뿔. 너 누구야! 나 알…… 윽! 끄-윽, 뭐, 뭐……!”
여러모로 짜증이 치솟았던 범근이 항의하던 도중 갑자기 목을 힘껏 졸랐고 뜬금없는 행동에 주변 모두가 얼어붙었다. 시윤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달달 떨며 범근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눈은 고사하고 발끝이라도 봤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시발! 해태! 저 새끼가 내 말 잘랐어! 내가 말하는데 방해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