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법정에 선 양심, 광장에 선 여론, 그리고 당신

by 초시계

오른손으로 누군가의 오른쪽 뺨을 때릴 수 있는가?



앵무새 죽이기. 내용이 앵무새를 죽이는 100가지 방법이라도 되나. 그렇다면 글쓴이는 조금 매정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며 첫 장을 펼쳤다. 내용은 완전 딴판이었지만.

책장을 넘기며 나는 1930년대 앨라배마의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갔다. 스카웃이라는 소녀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은 한여름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선명했다. 아이들의 놀이, 이웃들의 소문, 그리고 한 흑인 남자를 둘러싼 재판. 처음에는 그저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내 예상이 깨지기 시작한 부분은 톰 로빈슨의 재판이 시작되었었을 때부터였다.

1930년대 앨라배마의 법정. 애티커스 핀치는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며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왼손잡이만 가능한 폭행 흔적, 오른팔을 쓸 수 없는 피고인. 논리는 명확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유죄를 선고했다. 법정 밖 광장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섰을까? 증거를 믿는 법정 안에- 아니면 '모두가 아는 진실'을 외치는 광장에?



법이 말하는 것, 사회가 믿는 것

으음, 그러니까 소설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소설은 앨라배마 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데, 앨라배마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있다. 미국 남부는 목화, 담배, 사탕수수 같은 작물을 재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고, 이 넓은 농장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흑인 노예를 많이 부렸다. 반면 북부는 공업과 소규모 농업 중심이어서 노예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1860년대에 일어난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남부에 깊이 뿌리내린 인종 차별과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의 앨라배마에서도 그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핀치 가가 그리 부유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변호사 집안인데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농민들이 가난해지면서 유효수요 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도시 경제 전체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의 소득이 줄자 그들을 상대하던 전문직:의사, 변호사의 수입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소설 속의 커닝햄 가족처럼 돈 대신 작물로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거나, 아예 지불하지 못하는 의뢰인들이 늘어났다. 애티커스가 법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 역시 시대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백인들도 대공황으로 허덕이는데 흑인들은 오죽했을까. 대공황으로 인한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건 다름 아닌 흑인과 흑인농가였다. 소설의 로빈슨 가(家)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들은 결국 비극적으로 죽게 된다.

대공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 하나. 이거 역사 교과서에도 나왔던 것 같다.

작가 하퍼 리가 그려낸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은 우리에게 불편한 거울을 들이민다. 그곳에서 법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사회는 "흑인이 백인을 이길 수는 없다"는 불문율을 더 강력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애티커스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의 법정은 위대한 평등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배심원들의 편견 앞에서 메아리처럼 흩어진다. 정의는 판결문에만 존재했고, 현실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지배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2024년, 우리의 법정과 광장


최근 한국 사회를 보자. 누군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순간, 법정보다 SNS가 먼저 판결을 내린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교과서 속 문장일 뿐, 댓글창에서는 이미 유죄가 확정된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데 틀릴 리 없다"는 확신이 증거를 압도한다. 이것이 바로 '여론몰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법은 명백히 위법이라 말하지만, 사회는 "그 정도는 괜찮지 않냐"며 눈감아준다. 팬들이 연예인 사진으로 만든 굿즈, AI가 생성한 유명인의 이미지, 일상이 된 저작권 침해. 법적으로는 문제지만 문화적으로는 용인되는 수많은 경계들.


우리는 매일 애티커스가 섰던 그 자리에 선다. 법을 따를 것인가, 사회의 목소리를 따를 것인가.



스카웃과 젬이 본 것


소설 속 아이들, 스카웃과 젬은 재판을 지켜보며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배운다. 정의가 항상 승리하지 않는다는 것,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 젬은 판결 후 울먹이며 묻는다. "이게 공평한 건가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다."

애티커스가 답했다.


포기가 아니라 각오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장면이 인상깊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옳은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 애티커스는 질 것을 알면서도 변론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기에.


당신은 질 것을 알면서도 옳은 편에 설 수 있는가?



법이 이겨야 하는가, 사회가 이겨야 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어쩌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법과 사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보완해야 하는 존재다. 법이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때, 사회는 법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사회가 편견에 휩싸일 때, 법은 원칙의 선을 그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균형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을 맹신하는 것도, 여론에 휩쓸리는 것도 위험하다. 애티커스가 보여준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 뒤에 있어야 할 '양심'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법을 지켰지만, 그보다 먼저 인간의 존엄을 지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이 아닐까. 법이냐 사회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을 보는 시선.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소설 제목의 '앵무새'는 무얼 의미하는가. 앵무새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그저 노래만 부르는 새다. 그런 새를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애티커스는 말한다.

톰 로빈슨은 앵무새였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편견이라는 총에 맞아 죽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앵무새들이 있다.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 여론의 돌팔매를 맞고, 무죄 추정을 받아야 할 이가 사회적 낙인으로 쓰러진다.

고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던진 돌이 앵무새를 향한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동조한 여론이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은 것은 아니었는지.


앵무새



여전히 유효한 질문


[앵무새 죽이기]가 1960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소설이 던진 질문이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과 사회가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쩌면 정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애티커스처럼, 질 것을 알면서도 옳은 자리에 서는 것. 대다수가 돌을 던질 때 홀로 손을 내리는 것. 법정이 무너지더라도 양심만은 지키는 것.


그것이 어렵다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섰을까? 증거를 믿는 법정 안에- 아니면 '모두가 아는 진실'을 외치는 광장에?


내가 초반에 던진 질문이다.

여기서 '모두가 아는 진실'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당시 백인들 사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인종 차별적 믿음-"흑인은 믿을 수 없다", "백인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 등을 비꼬는 표현이다. 법정 밖 광장에서 환호한 사람들은 증거가 아니라 그런 편견에 근거해 박수를 친 셈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섰을까? 증거를 믿는 법정 안에- 아니면 '모두가 아는 진실'을 외치는 광장에?



<참고문헌>

https://histoires.tistory.com/109 -소설의 원활한 이해를 위해서 이 글도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https://marx21.or.kr/article/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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