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애 두번째 7살..(2부)

이른 봄의 논둑길

by 정예윤


할머니집에서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엄마 아빠가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곳의 겨울이 어떠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봄 여름 가을이 너무나 예뻤기에..
내가 그림만 잘 그린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멋드러지게 한장 그려내고 싶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해주세요



유치원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왜? 거기엔 유치원이 없었으니까


하루종일 놀아도 잔소리하는 엄마가 없다
매일같이 '안돼'라고 말하던 엄마 목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다


맨날 잔심부름 시키는 언니가 없었고
맨날 징징대는 동생이 없었고
맨날 울어대는 갓난 아기가 없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내가 엄마 아빠를 찾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엄마아빠를 대신해서 나를 혼내는
할머니가 있었지만 엄마아빠처럼 내 종아리에
회초리를 대지는 않으셨으니 그까짓 말로
혼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7살 꼬마에게
드디어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7살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잠이 덜 깬 나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집 잘보고 있으라 말하고 일하러 가셨고
늦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할머니가 없는 그 하루종일 나는
집안 구석구석 부엌 구석구석을 뒤져보고
집 몇 채 되지 않는 작은 동네였지만
길을 따라 여기저기 둘러보고 남의 집 마당안도
기웃거려 보고 드디어 기와집도 몇 채 있는
개울 건너 앞마을까지 모두 내 눈 속에 넣으며
온통 낯선 것들을 낯익은 것들로 바꿔갔다

내 또래이거나 위아래 거나
여하튼 어울려 놀 수 있는 애들도
대여섯명은 되었다


시골아이들이 원래 그렇다
위아래로 서너살 차이가 나도 스스럼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고 그랬다


할머니가 없다고.. 엄마 아빠가 없다고
울지도 않았고 혼자 점심도 잘 챙겨 먹었다
집에서는 반찬 투정한다고 혼나기도 했는데
할머니가 해주는 밥은 반찬없이 먹어도
매일 맛있었고 질리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맛나게 먹었던 밥이
훗날 울 엄마를 밤새 울게 만들 밥이 될 줄
그때는 몰랐었다






이른 봄의 논둑길



집 떠나올 때 엄마가 새로 사준 분홍구두가
시골 할머니집에서는 발에 맞지 않은 신발처럼
영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할머니집에 머무르는 동안 발이 더 커질거라
예상하고 내발보다 한칫수 큰 구두를 사준지라
뒷꿈치가 들락거리는 구두를 신고
울퉁불퉁 시골길을 걷다 보니 발 뒤꿈치가
까져서 물집이 생겼고 발등의 끈을 조이다 보니
발등에 걸쳐진 리본 때문에 발등이 빨갛게 쓸렸고
얇고 딱딱한 구두밑창 때문에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아팠다


오만군데 다 쏘다니는 철부지 발발이에게
예쁜 분홍구두는 도대체 쓸모없는 애물단지였다


할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나는 예뻐할래야 예뻐 할 수 없는
애증의 분홍구두를 신고 또 동네마실을 나갔다

파릇파릇 푸른 풀들이 올라오는 논둑길을 따라
걷다 보니 북돋기를 해놓은 논두렁들이 더러 있었다

일년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거였다


북돋기란 논바닥의 진흙을 논둑에 올려 곱게 발라놓은거다


북돋기를 해놓은 논둑에 발을 올리는 순간
분홍 구두가 진흙속으로 쑤욱 빠졌다

진흙속에서 꺼낸 분홍구두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별수없이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논둑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구두를 신었을 땐 몰랐는데
맨 발바닥에 밟히는 풀들이 주는 폭신함이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부랴부랴 샘터로 가서 분홍구두를 깨끗하게
씻어 널어놓고..

신발이라고는 저거 하난데 저게 말라야
내일 또 사브작사브작 마실을 갈텐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옷가지들은 바리바리 싸주면서
어째서 신발은 구두 한 켤레만 신겨서 보냈는지..
엄마가 원망스러웠던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한테
할머니.. 나 신발하나 사주면 안되요?

대답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내 신발은
올때 신고 왔던 분홍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나는 분홍구두를 앞에 놓고 갈등을 했다


이걸 신어 말어?
구두를 내치게 되면 나는 맨발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7살 꼬마가 내린 결정은
맨발이었다


나는 맨발로 동네마실을 나갔고
맨발로 어제 그 논둑길을 다시 걸었다


간혹 잔돌들에 발바닥이 움찔하긴 했지만
헐떡거리는 구두를 벗고 나니
세상 날아갈 듯이 발이 가벼워졌다


북돋기를 한 논둑에 도착해서 한발을 내딛으니
발꼬락 사이사이로 고운 진흙이 쏘옥 밀고 올라왔다
나머지 한발도 마저 내딛었다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진흙밭의
맨질맨질 간질간질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농사철이 다가오면서 북돋기를 해놓은
논두렁은 하나둘 많아졌고
구불구불 길게 뻗은 논둑길엔 천방지축
뛰어댕기며 노는 7살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어느날
아저씨 한분이 집에 와서 할머니한테
뭐라뭐라 하고 돌아가고 나서 며칠 논둑길에서
뛰놀았던걸 할머니가 알게 되셨고
그날 이후 내게는 논두렁 금지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일을 나가시면서
샘에서 물을 떠다가 물동이에 채워놓으라 하셨다
다행히 콩쥐팥쥐에 나오는 밑 빠진 독은 아니었다


나보다 키가 큰 물동이였다
팔을 위로 쭈욱 뻗어야 물을 부을 수 있었다

집에서 샘까지 거리는 돌이켜보건데
100미터 안쪽이었을 것 같다

샘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물동이에 붓고
다시 샘으로 가서 그동안 샘에 채워진 물을 뜨고
대략 스무번 이상은 왔다 갔다 했던거 같다


물동이에 물이 찰랑찰랑 채워질 때쯤이면
나는 기진맥진해서 뛰어놀 힘도 없었고
점심 한 그릇 찾아 먹고 나면 그대로 뻗어서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3부 예고

할머니.. 내가 멸치 잡아왔어요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7살 철부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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