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택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는 제목 그대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 네 명을 중심으로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 네 인물은 모두 변혁의 길을 선택한 대가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요시다 쇼인은 29세에 참수되었고, 사카모토 료마는 31세에 암살당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49세에 자결, 오쿠보 도시미치는 47세에 암살되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당연시되어 온 삶의 규범과 제도를 거슬러 변화를 추구했고, 그로 인해 시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먼저 요시다 쇼인은 “독서하는 사무라이"라는 별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수백 권의 책을 읽어낼 만큼 집요한 학구열과 통찰력을 갖춘 그는, 기존의 봉건적 구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조건 양이(攘夷)를 외칠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운영했던 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는 선생과 제자 간의 위계보다 자유로운 토론과 실천이 중시되었고, 그곳에서 훗날 유신을 떠받칠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쇼인의 텍스트에서는 대외 팽창론이 엿보이는 등, ‘전통을 지키면서도 서양의 힘에 맞서려면 결국 우리도 강해져야 한다'는 급진적 발상이 드러난다.
이는 막부 말 혼란기에 ‘의병(義兵)처럼 싸워야 한다'는 단순한 배외(排外) 구호와는 달랐으며, 해군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한 발 앞선 전략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번을 초월한 혁신가의 표상이다. 무엇보다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간파했고, ‘삿초동맹'을 중재한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자기 번인 도사를 떠나 낭인(浪人)이 되는 일은 생계와 신분을 한 번에 포기하는 모험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진짜 일본"을 세우기 위한 길을 택했다.
료마는 해군을 키워야 한다며 배를 구입하고 선원들을 양성하려는 비전을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는 검으로 싸워야 한다는 통념을 깨뜨리고, 바다의 서양을 상대하려면 신식 기술과 해상력이 필수라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이는 이후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가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신의 영웅'이자 ‘마지막 사무라이'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대변하면서도, 메이지정부의 근대화 방향 자체는 올바르다고 봤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조선 정벌론을 통해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고자 했으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해 결국 정한론은 무산된다.
그 뒤 정치적 타협에 실패한 사이고는 반정부 무력투쟁에 나서다가 결국 전사하게 된다. 정부와 사무라이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고 싶었던 그의 리더십은 막판에 ‘무력봉기'라는 극단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는 현대인들이 “왜 개혁의 주도 세력이 반동(反動)의 상징이 되었나?”라는 아이러니를 곱씹게 만든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냉혹한 현실주의자"로서 메이지정부의 근대화를 설계하고 강력히 밀어붙였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 판단한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인 폐번치현(廃藩置県)을 주도하고, 독일 프로이센을 본보기로 한 관료제·행정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식산흥업에 매진해 철도, 전신, 항만 등 사회 인프라를 국가 주도로 건설함으로써, 일본이 짧은 시간 안에 산업혁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일을 열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릅쓴 그의 ‘탑다운'식 근대화는 대중적 반발도 적지 않았고, 결국 그는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현실을 냉정히 파악하고 미래를 설계했음에도, 희생 없이 대전환을 이끌긴 어려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