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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Nov 29. 2021

돈 넣고 돌 뽑기


내년 달력을 사려고 기웃거리다가 후긴 앤 무닌의 'Favorites 2019'라는 드로잉 노트를 샀다. 내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올해를 돌아보는 것도 아닌, 곧 삼 년 전이 될 재작년의 기록을.


"오늘 하루 유심히 보았던 것, 재미있는 상상,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그린다"는 소개글에 반해서였다.

그건 내가 브런치에 쓰고 싶은 글의 주제와 닮은 문구이기도 했다. 한 줄의 소개글에 반해 달력이 아닌 드로잉 노트를 산 건 정말이지 말에 자주 반하는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노트는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그림과 질감과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2019년에 만난 스물아홉 개의 물건에 대한 짧은 문장과 그림에 29번까지의 일련번호가 붙어있었다. 그림만 봐도 그 물건을 가진 듯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있었고, 디자이너의 마음과 기분을 상상할 수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 문장이다.


"여행 중 캡슐 뽑기에서 뽑은 작은 원석. 다음에 왔을 때 또 뽑아야지 생각하고 다시 찾았을 땐 원석 뽑기는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지구처럼 아름다운 돌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뽑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가까운 누군가 뽑기를 하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내 지갑을 뒤져 동전을 내줄 용의가 있다. 뽑기를 해서 나온 결과물이 기계에 넣은 돈보다 적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해도, 캡슐 뚜껑을 열어볼 때까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설렘에 두근거리는 기대덤으로 주기 때문이다.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을 풍성한 꽃다발처럼 만드는 게 작은 동전 하나라니. 설령 아무것도 뽑지 못하더라도 네가 말한 건 다 들어주고 싶단 마음을 들키는 게 동전 하나로 충분하단 사실도 고마운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 길에서 주웠다며 자꾸 뭘 주는 사람. 시간과 돈과 정성을 들여 산 선물이 분명한데 쑥스러워서 길에서 주웠다고 돌려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길에서 주운' 걸 주는 사람. 그가 길에서 주웠다며 가져온 건 정말 누가 잃어버려도 찾지 않을 법한 것들이었다. 이음새 부분이 고장 난 머리핀, 바스러지기 직전의 낙엽, 오십 원짜리 동전. 그런 것과 더불어 뽑기에서 뽑은 걸 줄 때도 있는데, 눈을 반짝이며 건넨 건 주로 문방구에서 파는 작은 반지나 내가 잘 모르는 캐릭터 미니어처 같은 것들이었다. 받을 때마다 정말 설렜다.


길을 걷거나 뽑기를 하다 우연히 반짝이고 예쁜 걸 발견했는데, 그걸 나한테 주려고 손에  쥐고 뛰어온 모습이 한눈에 그려졌다. 내가 얼마나 기뻐할까, 어떻게 웃을까 상상했다며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  내려놓듯 조심스레 내 손에 가진 걸 떨구는 게 좋았다. 그때마다 나는 정말 마음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아서 활짝 웃었고, 가끔은 작은 손이 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뻐근하기까지 했다.


나에게 그런 학생들이 있다. 어리고 순하고 포동포동한 뺨을 가진 아이들. 그 시절에만 존재하는 연한 분홍색 손톱으로 줍거나 뽑은 걸 나한테 주고 나서 그 아이들은 훌쩍 큰다. 나한테 준 걸 까맣게 잊고, 내가 모르는 새 다른 시절로 전력 질주한 것처럼 순간 이동을 한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물건만 남은 자리에 더 자랄 일 없는 나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가끔 서랍을 열어 기쁨의 순간들을 바라본다. 웃음 없이도 마음을 밝히는 것들이 거기 누워있다. 무언가의 쓸모가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의 증거로 남은 것들. 그것들은 여전히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에 속한다.


돌을 뽑는 뽑기 기계가 있고, 그 앞에 우리가 서 있다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니까(도대체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소망+다짐+반성은 언제 실현되는 걸까.) 뽑기는 하지 않고 대신 너에게 동전을 줄 것이다. 너가 뽑는 게 그날의 공기뿐이고, 하... 아무것도 못 뽑았네, 라는 대사와 함께 아쉬움 가득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끝나는 엔딩이더라도. 설레고 기대에 차, 둘만 아는 비밀이라는 신호로 마주 보고 눈을 찡긋하는, 둘 중 하나는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 초를 위해 기꺼이 내 전재산의 일부를 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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