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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Dec 02. 2021

이렇게 귀여운 시 본 적 있나요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해피 버스데이_ 오탁번>


이 시의 주제는 오해에서 빚어진 행복이라고 한다. 설탕을 넣기 전의 미숫가루는 텁텁하다. 흙을 입에 넣고 우물거려본 적은 없지만 흙에 맛이 있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고 꺼끌거리는 맛이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소함이 있긴 한데 밥알처럼 씹을수록 우러나는 달큼함이 아니어서 설탕이나 꿀 없이는 도무지 할머니가 타 주시던 그 그립고 시원한 맛이 아니다. 오해는 설탕 빠진 미숫가루 같아서 우리가 상상 결말을 쉽게 안 보여주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해 실망한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자주, 울기 직전의 얼굴을 만드는 오해도 가끔 기특한 일을 한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 이 시처럼.


응, 울 딸은

엄청 부드럽고 예뻐.


엄마한테 며칠 전에 이런 문자를 받았다. 집중해서 뭔가를 하다가 급히 문자를 확인하느라 윗줄은 건너뛰고 아랫줄만 읽었다. 나도 모르게 내 맘대로 편집해서 읽은 것이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칭찬에 인색한 이다. 애정 표현이나 칭찬에 적극적인 학생이 한 달 동안 나한테 한 표현보다 엄마가 평생 나한테 보여준 표현이 더 적을 정도다. 그런 엄마가 '양이나 정도가 아주 지나친 상태'를 뜻하는 '엄청'이라는 부사를 썼다. '엄청' 하나만으로도 놀라운데 '부드럽다'는 형용사를, 사람한테는 잘 쓰지 않는 귀한 형용사를 '예뻐'와 나란히 썼다. 속에서 울컥 뭐가 치밀었다. 어린 시절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예쁠 리 없는데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은, 엄마가 늙었거나 나를 좀 더 좋아하게 됐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문자를 보고 눈물이 핑 돈 이유로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강아지 이모티콘과 함께 이런 답장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이때 내 격한 반응을 보고 좀 어리둥절했을 것 같다.)


세상에나. 예쁜 것만으로도 좋은데 부드럽기까지!


엄마의 문자가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내가 선물로 보내준 담요 이야기라는 건 한밤중 문자를 다시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문자는 정확히 이런 내용이었다.


응, (담요가) 울 딸처럼

엄청 부드럽고 예뻐.


부드럽고 예쁘단 말도, 내가 먼저 (도착한 담요가) 부드럽고 예뻤으면 좋겠어요, 라고 문자를 보낸 데 대한 긍정의 대답이었다.


내 얘기가 아니라 담요... 였구나. 그렇지, 내가 담요도 아니고 엄청 부드럽고 예쁠 리가...

가만있어 보자, 그럼 내가 담요보다 못한...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하하.


최고급 밍크도 실크도 아닌 평범한 담요를 엄마가 그렇게 표현한 것도, 그걸 보내준 마음에 대한 애정 표현이겠지. 잠시나마 엄마의 예쁨을 듬뿍 받는 딸이 되어 발이 땅에 안 붙어있는 강아지 같은 마음이 되었 게 좋았다. 아마, 버스를 기다리다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노래 선물을 받은 할머니만큼 좋았을 것이다.

누군가 녹지 않는 눈사람을 집 앞에 만들어 놨으니 같이 보러 가자는 연락을 해서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나간 것처럼. 내일도 모레도 눈사람은 거기 있을 텐데 오늘까지만 겨울인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앞에 오래 서 있다 들어왔다. 세밀화 그리는 사람처럼 들여다본 눈사람의 표정을 마음에 찍어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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