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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Dec 07. 2021

치킨 시켰는데 한 마리 많으니까 먹으러 올래?

a.k.a  박준 시인과의 만남


싱크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 이 글을 다 쓰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는 퇴근 후 내가 매일 해야 하는 숙제들 중 하나다. 미룰 수만 있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미루고 싶은 집안일이기도 하다. 설거지에 관한 내 마음을 빅 데이터로 그리면 이 마음이 상당히 큰 글씨로 박혀 있을 것이다. '누군가랑 살아야 한다면 설거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고.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누군가 설거지를 진짜 좋아한다고 말해도 그건 나를 배려거짓말이란 걸 이제 안다. 매일 해내야 하고, 잠들기 전에 반드시 마쳐야 하는 일들 중에 가장 하기 싫은 일을 끝내고 나면 드디어 하루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제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시간이 누구도 걷지 않은 길처럼 펼쳐져 있는데, 정작 그 길에 서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가끔 생각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이런 일상이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되고 다 쓴 하루치 공책을 덮는 동작처럼 가볍지만 확실한 하루의 마무리가 되는 건가. 이 마무리가 결국 다음날 공책을 펼칠 구실이 되어주는 건가. 드물게, 하루의 공책을 덮은 후의 깜깜한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그때 걸려 오는 전화가 심상한 안부 전화가 아닐 거란 건 벨소리만 들어도 수 있다. 파자마 차림에 눈도 반쯤 감겼는데 세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 뭔가 큰일인 건가 싶어 받으면 이런 말이 귓속에 사뿐히 앉는다.


- 치킨 시켰는데 한 마리 많으니까 먹으러 올래?

-... (새벽 두 시에?)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퇴근하고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 그럼 내일. 이렇게 끊으면 가까운 사이가 아니거나 절박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 너는 내일 저녁에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대꾸하는 사람을 만난 적 없다. 내가 그런 사람에 가깝긴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쪽에 가깝지만 솔직 말 못 하고, 그래, 그럼 내일. 그렇게 전화를 끊는 사람이다. 마음에 저런 말을 숨겨 놓긴 한다. 내일 저녁 이 땅과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긴 하겠지만, 너와 치킨을 먹고 싶은 '지금의 나'는 없을 거란 말을 입밖에 내지 않을 뿐.

친구의 대답을 들은 박준 시인은 저렇게 말하는 친구를 혼자 둘 수 없어 고양에서 분당까지,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새 벽 세 시 넘어 친구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 넌 왜 일 센티 정도 되는 상처를 너 스스로 후벼 파서 깊게 만들고, 덧나게 해?

   그리고 평소엔 연락 한번 없다가 왜 연애만 끝나면 내가 너 베프가 돼줘야 해?

잔소리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시인은 친구의 손목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시인으로 변신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변죽을 울리는 말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더 충실한 말이 아니라, 참말을 하기 위해서. 시인이 '참말'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나는 '찬말'이라고 들었고, 무언가 가득 들어찬(진심이나 마음 같은 게) 풍성한 바구니 같은 말을 상상했다. 박준 시인이 그날에 대해 쓴 시가 이 시다.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그해 봄에_ 박준 >


위로와 이해와 공감을 숨긴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삼켰을까.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말 뒤에 숨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찬말, 아니 참말을 하기 위해 그 순간 친구가 아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볼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속도가 마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속에 넣어두어야 하는 말이 늘어나 혼자 바빴다. 계단식 의자가 있는 서늘한 강당, 박준 시인의 이야기를 듣던 오후 두 시, 통닭을 함께 먹고 싶은 이들은 다 멀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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