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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an 14. 2022

내가 뭘 하면 당신이 기운 날까?

<패터슨>


수업이 끝나고 나서 가방을 싸며 학생이 말했다. 어제 친한 친구가 이사를 갔다고. 꽁꽁 묶어 다락에 올려놓은 보따리에 제대로 담기지 못해 삐죽 고개를 내민 장난감 자동차가 마루에 툭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좋아하던 사람이랑 헤어지면 목소리보다 눈물이 먼저 왈칵 쏟아지는 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울었어?

아니요. 근데 피아노 선생님이 그만두실 땐 울었어요.

친구보다 피아노 선생님을 더 좋아했구나,라고 말하려는 순간 학생이 말했다.

친구는 멀리 가도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다시 만날 수 없으니까요.


그래. 우린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질 때가 아니라 다시 볼 수 없단 걸 확신할 때 슬퍼진다.

난 너희들이 졸업할 때까지 여기 있을게.

내가 먼저 떠나진 않겠단 뜻으로 그렇게 말하자 학생이 대답했다.

저도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한테 배울 거예요.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다음 고마워,라고 겨우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마음을 다 보여줄 순 없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면 열린 문틈 사이로 눈이 마주친 거나 다름없다.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올해의 소중한 고백으로 그 말을 서랍에 넣어두기로 다.


일과를 끝내고 거실에 앉아 채널을 돌릴 땐 분명한 목적이 있다. 보고 싶었지만 놓친 영화를 우연히 발견해 영화에 푹 빠져 있다가, 하루의 마지막 부분이 영화 속에 찰랑찰랑 잠겨있는 채로 잠드는 거다. 아무리 채널을 열심히 돌려도 보고 싶었거나,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우연히 만나는 경우별로 없다. 가입한 플랫폼에 제목을 써넣고, 바른 자세로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이다. 알면서도 나는 오늘이 우연한 만남의 타율을 높이는 날이 아닐까 기대하며 채널을 돌린다.


영화 패터슨은 이미 반이 지난 무렵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생일 즈음에나 한번 더 볼까, 하고 아껴둔 영화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젖은 속눈썹처럼 무거워 솜사탕 같은 장면이 필요한 날이라 어쩔 수 없었다. 평화로운 산책을 닮은 전반부는 은막 뒤로 사라진 지 오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의 후반부에 나는 멍하니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는 대사, 아는 장면인데도 입을 벌리고 봤다. 패터슨 시에 살고 있는 패터슨 씨보다 아내한테 마음이 쓰이는 두 번째 관람이었다.


화면에서는 그녀가, 흘끗 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정말 행복해.

왜였지? 그녀가 왜 이렇게 행복으로 반짝였던 거지? 바로 다음 대사가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기억력을 탓하고 있을 때 그녀가 그렇게나 행복한 이유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286달러나 벌었어.


주말에 열리는 마켓에서 직접 구운 머핀으로 그만큼의 돈을 번 사실이, 산들바람에 팔랑이는 여름 원피스 같은 표정을 만든 것이다. 나는 286달러를 벌고도 그렇게 기쁜 표정을 짓지 못해서 그녀보다 덜 행복하게 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표정이었다.

여기가 행복의 정점인가, 하는 의문이 들 무렵 이어그녀의 말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문장으로 풀어쓴 것 같은 한 마디였다.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가자.


이 말엔 생각보다 많은 행복의 조건이 숨어 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극장에 가려면 최소한 집에 초대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야 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해 기꺼이 요리를 해야 하고, 다 먹고 나선 그저 뒹굴뒹굴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야 한다. 옷을 차려입고,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늦은 시간에 하는 영화를 볼 정도의 부지런함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둘 중 한 명이 집에서 OTT로 영화 제목을 검색해서 보자고 하거나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쉬자고 하면 불가능한 외출이. 둘의 마음과 열정과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같아야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다.


패터슨은 여유 있는 사람이다. 여유야말로 패터슨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정체성이고 방향이고 목적이다. 보고 있기만 해도 일상에 뺏긴 나만의 시간이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다. 다음 활력을 위해 채워놓아야 하는 여유의 눈금이 뿌듯이 기우는 기분.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여유를 나누어 줄 정도로 여유로운 그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좌절의 순간은 있다. 지켜보는 사람마저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참아야 하는 순간. (다시 봐도 숨을 쉴 수 없는 장면이다.) 그 순간에도 그는, 아무에게도 화를 내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내가 뭘 하면 당신이 기운 날까?

그녀가 묻는다. 나 들은 적 있고, 한 적도 있는 말이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 아무리 궁리하고 고민해도 위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 상대도 아마 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했을 말.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그 말을 듣는 패터슨 씨 표정을 볼 겨를이 없었다.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엔 혼자 있을 도리밖에 없으니까. 혼자 있으면서도 더 혼자이고 싶패터슨 씨 마음이 그 순간 내 표정과 닮았 테니까. 그럴 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해주지 못한 걸 벤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해주기도 한다.


당신도 패터슨의 시인인가요?

아뇨. 난 버스 드라이버예요.

시적이군요.

글쎄요, 그런가요?

당신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패터슨 시가 고향인 시인)의 시가 될 수 있죠.


울고 있는 사람에게 먼저 이별을 말하지 않고, 말하더라도 먼저 우는 사람은 안 되겠다는 다짐 같은 건 이럴 때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패터슨 씨처럼, 모르는 사람한테 받은 빈 페이지를 펼치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보러 갈 영화 제목을 적 희고 고요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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