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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an 17. 2022

마티스와 엄마


응, 나 지금 전시회 왔어. 아니, 같이 왔지. 응응, 그랬구나. 여하튼 지금은 전화받기 그러니까 좀 이따가... 아, 그래?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구나. 저런...


전시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벨소리가 렁저렁 울린다. 누가 이렇게 벨소리를 크게... 말은 안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가 수줍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다. 표정은 분명 미안한데 누구보다 쾌활하고 분명한 발음이라 전시회장에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이 순식간에 배경음악이 되고 만다. 음악을 배경 삼아 방송되는 디제이 목소리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오래 잠들어 있던 고요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잠깐 쳐다봤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니까 그럴 수 없다. 일행이 아닌 척 한 걸음 엄마한테서 떨어져 내 앞에 놓인 작품을 주의 깊게 감상하는 척한다. 엄마, 여기선 통화하면 안 돼. 그런 말을 해봤자, 나도 알아, 그래서 빨리 끊었잖아. 그런 답이 돌아올 걸 아니까.


티격태격하면서도 엄마랑은 새로운 곳에 함께 자주 가는 편이다. 엄마한테 엄마의 신념이 아닌 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건 미국 횡단을 할 때 깨달았다. 바나나를 먹고 출발하겠다는 엄마를 기다려주지 않고, 여기 공기가 탁하니까 밖에 나가서 먹으면 안 돼?라고 했다가 한국 가는 비행기표 당장 끊으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 해설을 들려주려고 내 에어팟에 엄마 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해, 재생 버튼까지 눌러줬는데 어느새 엄마 내 쪽으로 와서 묻는다.


이거 왜 안 되지?

이 그림이 (재생 목록에) 왜 없지?  

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


몇 번 그런 과정이 반복되자 내가 상냥하지 않았나 보다. 엄마는 예의 그 무기를 꺼낸다.

아유, 나 이거 하기 싫다.

마티스 그림이 없네, 판화만 잔뜩 있고. 내가 그렸던 그 정물화도 없고. 주요 작품은 우리나라에 못 가져왔나 보지?

이 순간은, 내 귀를 헤드폰이 덮고 있단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나는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도슨트의 설명에 집중하느라 엄마 말을 못 들은 것뿐이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거기 멀거니 서 있었던 게 아니다.


마티스의 단순한 선과, 크고 또렷하게 말하는 색으로 가득한 작품 앞을 서성인다. 병원에서 구상하고 만든 작품 '수영장'과, 관절이 뒤틀려 붓을 쥘 수 없어 가위로 오려 만든 작품들 앞을 서성이며 생각다. 어떤 사람이 아픔을 가장 환한 색으로 칠하는가. 프리다 칼로와 베르나르 뷔페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마티스 무엇이 그들과 달랐는가.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먼발치에서 엄마를 발견했다. 작품에 빠진 표정이다. 좋은 쪽으로든 아닌 쪽으로든 엄마는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생각하며 뒤에서 엄마를 안았다. 조용한 미술관,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았고 그림만 우리를 바라보았다.

으으응? (얘가 왜 이래?) 좋거나 나쁘단 느낌이 섞이지 않은, 그저 깜짝 놀랐다는 느낌의 감탄사였다. 엄마를 안아본 지 오래됐다. 엄마가 나를 안아준 것은 더 오래됐을 것이다.


전시가 끝나는 길목엔 가끔, 거장의 분위기를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 존이 있다. 마티스는 판화 작품이 많은 화가라, 색색의 마스킹 테이프와 채도가 낮은 편지지와 함께 판화를 찍을 수 있는 도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재료들 앞에서 눈에 띄게 열심인 표정으로 몰두해 있었다. 어림잡아 열댓 명이 자기만의 마티스풍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엄마 주변에서만 보이지 않는 불꽃이 이글이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들기 전까 집에 가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서늘한 공간의 온도를 올리고 있었다. 집중해서 동그랗게 말린 몸으로, 종이 위에 비장하게 도장을 찍는 엄마 후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눈이 아프고 팔목도 시원찮아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는 엄마는, 오래 걷는 건 질색하면서도 전시는 즐거이 따라나선다. 이름을 날린 적 없는 화가로서의 엄마 삶을 생각하면 언제나 전시회에 엄마를 위한 자리 하나를 남겨놓고 싶어 진다. 이런 말을 들으면 더 그렇다.


마티스는 팔에 붓을 묶어놓고 그렸다는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어쨌든 지금은 그림을 못 그리니까, 마티스가 나보다 나은 건가.


출구를 지나 아트샵으로 나와 노란 필통 물끄러미 쳐다봤다.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였다. 엄마는 내가 그 앞에 오래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

이 필통 사줄까?

아니, 그냥... 본 거야.


친구가 헤어진 애인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디든 내가 오래 서 있으면 그 사람은 늘 사줄까? 물었어. 나는 진짜 사줬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마음을 짐작해서, 가진 돈이 얼마든 애인이 갖고 싶 걸 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얼마나 오래가가에 대해 생각했으니까. 

엄마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사줄까? 하고 묻거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고 말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사랑한다고 말 안 해도 알잖아,라고 말하고 나는 말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사랑은 표현이지,라고 말한다. 이 포지션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바뀌지 않는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열심히 만든 작품 중에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작품을 골라 엄마가 내게 내밀었다.

넌 이런 거 좋아하잖아.

(러플이 잔뜩 달린 블라우스나 도저히 밖에는 못 입고 나갈 드레스 같은 걸 줄 땐 언제고?)

엄마는 종종 나를 오해하고, 불쑥 찾아오고, 절대 사랑한다고 말하 않으면서 수업 중인 내게 다급한 말투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 L 홈쇼핑에 나오는 화장품 있잖아, 그거 좀 주문해줄래? 엄마가 돈은 줄게.


우리집 복도엔 '엄마의 뜰'이란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생각하며 그린 푸른 들판이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나를 볼 때, 그 뜰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제일 예뻤을 때를 생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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