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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r 09. 2022

파리에 선배가 왔다

더현대 서울 <테레사 프레이타스 전>


여기를 왜 연인들의 도시라고 하는지 알겠다.

왜 그러는 것 같은데?

아무 감정 없는 사람하고 와도 사랑에 빠지겠어. 사진 찍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면

이 도시 연인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거든.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먼 데를 쳐다봤는데, 아무 데도 향하지 않 그 시선 끝에 한국에 두고 온 선배의 연인이 있을 거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러 세계를 돌아다니선배는 성공한 사진작가였다. 성공의 증거는 전시회의 명성이나 선배 이름으로 낸 책과 굿즈들일 수도 있었지만 나한테는,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선배가 게스트로 초대된 일이었다. 우리가 동시에 좋아하던 디제이였다.


안락한 호텔에서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선배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유학생인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해왔다. 학창 시절 남달리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아니고, 서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 선후배였을 뿐인데 며칠 함께 보내고 싶단 연락온 게 뜻밖이면서 반가웠다. 선배의 글과 사진이 실린 잡지와, 한국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한 보따리 선물을 들고 선배가 도착했다. 선배의 등짝만 한 카메라 가방 두 개와 함께.

종일 그만한 걸 두 개나 메고 다니면 힘들 것 같아 하나는 내가 잠깐 들어주겠다고 맡았다가 무게에 깜짝 놀랐다.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는 동안은 어깨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도 어깨에 멍이 들었으니까.


에펠 탑에서, 우리는 거기 모두가 사진 찍는 장소를 그냥 지나쳤다.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처럼 탑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바로 앞 풀밭에 격자무늬 담요를 펼치고 샌드위치와 주스를 꺼냈다. 우리가 희미하게 음악을 틀었던 건지, 조금 떨어진 소년 무리가 잔잔하게 틀어놓은 음악이 우리한테까지 스몄던 건지 모르겠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배처럼 작게 몸을 흔들며 음악을 듣다가, 먹을 게 다 떨어진 다음에는 누워서 팔로 목 뒤를 괴고 하늘을 봤다.


구름이 지나가는 걸 보는 건 그 시절 가장 즐겁시간을 보낸 방법 중 하나였다. 에펠 탑은 우리 눈 잠깐 들렀다 떠나는 구름 사이에선 늠름하다가 그늘 아래선 조금 더 선명해졌다. 비 그친 다음이라 구름이 다 지나가고 해가 나면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눈이 부셨다. 누워서 봐야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우리 서로에게 가까웠다. 나란히 흘러가는 한 쌍의 구름들처럼.


선배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몇 달 지나 소포가 하나 왔다. 한 해의 일기를 다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한 다이어리였다. 모든 페이지가 선배가 찍은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함께 걸었던 곳과 아닌 곳을 가늠해 보다가, 어떤 장에 이르자 도저히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없었다.


에펠 탑 아래 풀밭에 누워 웃고 있는 우리였다.


탑이 거기 있었다는 걸 우리 말고 아무도 모를 정도로, 풀냄새와 희미한 노랫소리와 웃음만 남은 한 장이었다. 눈이 부셔 반만 뜬 눈으로 본 세상처럼 더없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톱만 한 우리였다.








*사진은 모두 테레사 프레이타스가 찍은 것이고,

그녀가 제 선배인 건 아닙니다. 사진을 보니 선배가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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