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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r 22. 2022

비 오는 날의 피크닉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비 오면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는 너를 끌고 같은 길을 뱅뱅 돌았지. 날 만나러 이런 악천후에도 집을 나섰다는 한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거든. 지나가던 차가 뿌린 빗물에, 우산 속까지 줄기 둘 다 축축해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춥고 지친 어깨로 찾아가는 따뜻한 지붕은 왜 다 멀까.


다른 동네 가기 전에 맛집을 검색해보 하니까, 어디가 맛있는지 알고 있긴 했어. 그래도 우산과 비로 반쯤 가려진 화면 속을 통과하는 중이라 우리는 간절한 간판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여기가 그렇게 피자가 맛있는 곳이래. 맥주도 직접 만들고.


맥주를 좋아하는 너니까 여기라면 마음에 들어 하겠지, 싶어 들어선 곳이었어. 피자를 굽기 전이라 훈훈한 느낌 없이 냉랭한 실내였는데도 곧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이 나오겠지, 생각했어. 그런데, 먼저 나온 맥주 두 잔 한여름 한낮에나 어울릴 정도로 찬 거야. 생각보다 더 서늘한 컵을 들고  손을 더 차게 얼리고 있자니 당황해서 입이 안 떨어지더라. 아, 어쩌지. 이 곤을, 이 차디찬 맥주와 분위기와 웅덩이빠진 것처럼 흠뻑 젖은 발을.


펍의 잘못이 아니라,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메뉴 선정에 시간에 맞지 않는 주종의 선택이 문제였겠지만 우물쭈물 거기 앉아있던 우리는 좀체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지. 여기서 나가자고 하면 상대가 무안하겠지, 둘 다 그런 생각을  걸 거야.

나는 더 미안했어. 아늑하고 보송보송한 에서 널 끌어내 축축하고 어두운 곳 데려온 기분이었거든. 바들바들 떨며 맥주잔을 부딪치고, 새파란 입술 끝을 적신 한 모금에서 조금도 진도를 나가지 못한 채 거기 앉아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던 날. 비 때문에 자꾸 지워지던 길과 건물과 우산에 얼굴이 가려진 사람들을 말없이 내다보던 그날. 평생 너랑 맥주를 마셔야겠다, 생각했다. 여전히 네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주량이지만.


맥주 한 모금 피자 한쪽을 겨우 먹고 우리가 또 어딜 갔던가. 낯설고, 그래서 두근거리는 모험을 하러 다른 방향으로 떠났던가, 그건 기억이 안 나. 장갑을 고 나온 12월, 목도리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휑한 목과 창백한 얼굴로 폭우 속을 헤매갑자기 웃음이 터진 건 기억나는데. 취기 때문지, 대책 없 폭우 속하염없 걷던 일 때문인지 모르겠어. 아무리 크게 웃어도 누구도 돌아보지 않 길, 우리랑 비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길 위에서, 젖어서 끈적해진 우산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다시는 비 오는 날 만나지 말자,


외쳤 잊혀지지 않아. 물이 찰방찰방한 길 위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 무성한 그늘 아래 숨 오후가, 이렇게 기억에 남는 피크닉이 될 줄 몰랐지만.


얼마 전에 전시관과 이름이 같은 카페 '피크닉'에 갔어. 흐린 날이었지만 다사로운 햇살이 잠시 고개를 내민 순간이 있었지. 서로를 너무 열심히 바라보느라 다른 게 보이할까 싶은 연인들 틈에서, 우리의 미래 같은 뒷모습을 봤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방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말없이 흐린 하늘을 보고 있 느긋한 부인들. 침묵 사이로 이런 말이 지나는 것 같았지.


비 오겠는데.

조금만 더 있을까...

우산 있어?

아니. 뛰어가서 사 올까?

뭘 뛰기까지... (사이) 그래도 네 무릎이 나보단 나으니까 너가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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